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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16. 2019

찬바람 돌아오고 날은 흐려 서점에 머물기 좋은 날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시간은 늘 스쳐가고,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그 시간을 기록한다. 그 중에서도 글쓰기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록법이다. 흘러간 시간들을 툭툭 털고 일어서는 쪽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는 쪽에 가까웠던 나는 어려서부터 온갖 것들을 글로 써서 기록했다. 뭐 그렇다고 매일 일기를 쓰는 부지런하고 규칙적인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한 가지 글쓰기 습관은 제법 마음에 배었는데, 바로 무언가를 읽었던 시간을 기록하는 습관이다.


무언가를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무궁화호 좌석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창밖의 풍경을 읽다가 또 시집을 읽는 시간을 좋아하고, 병원 대기실에서 언제쯤 끝날지 모를 기다림을 예쁜 잡지들로 가볍게 덜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약속 시간 사이의 애매한 틈을 메우기 위해 서점에서 신간도서들을 훑어 읽는 시간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어느 휴일 오후를 온전히 덜어다가 방 안에 쏟아놓고 빈둥거리며 소설책 한 권을 이어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마어마한 다독가나 애서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도 아니면서 제법 사람처럼 말도 많고 생각도 많고 묘하게 온기도 갖춘 이 책이란 녀석과 교감한 시간을 좋아한다. 좋아해서 기록한다. 그건 사실 나를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찾아갔던 날부터 보르헤스의 아파트는 어딘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소년 망구엘이 대작가 보르헤스를 찾아갔던 날들을 기록하는 일 역시 나를 기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기록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던 그 시간의 잔상들은 <보르헤스가 가는 길>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지난 봄 중고서점에서 몇 페이지를 훑어 읽은 후 내내 마음 한 쪽에 남아 있다가 얼마 전 다시 찾아 읽게 된 책이다. 서점에서 일하던 열여섯 살 망구엘이 그 서점의 손님이자 이제는 장님이 되어 버린 보르헤스에게 혹시 책을 읽어주러 올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게 되는 이야기를 역시나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경험은 무척 매혹적이어서 아직도 그 순간이 선연하다. 아마 그래서 나 또한 참지 못하고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아. 만약에 어떤 책이 없어진다면 누군가 언젠가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쓸 거야. 그 정도면 누구라도 충분하다고 여길 만한 불멸이잖아.”


보르헤스가 망구엘에게 들려준 말처럼 책은 불멸이라는 단어와 아주 가까운 데에 존재한다. 책의 탄생 자체가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기억이 기록이 되고, 기록이 다시 기억이 되어 영원한 도돌이표를 이루게 하려는 마음에서 모든 책은 시작된다. 그 책들과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은 그래서 이 도돌이표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꽤 낭만적이고 유서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봄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이라는 제목에 눈이 가 닿은 데에는 보르헤스에 대한 나의 추억도 한 몫 작용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라는 이름의 도돌이표에 걸린 것인데, 내가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다시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십대의 끝 무렵이었고, 그 때 나는 몹시 안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안온하다 못해 몹시 지루해서 영미문학에 대한 엄청나게 긴 강의와 중남미문학에 대한 못지않게 긴 강의를 인터넷으로 신청하여 들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 강의에서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주워듣고는 그의 단편집 <픽션들>을 빌려 읽었었다. 무척이나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매혹적이었다. 그 후 몇 년을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바뀌면서 바쁘게 보내다가 다시 그 지루함의 구간으로 접어들던 찰나 다시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이라는 책을 발견했으니 이래저래 갖다 붙여 보면 꽤나 필연적인 재회였다.

그리고 그 재회는 다시 오늘의 글을 남겼고, 나는 여전히 부지런한 기록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책을 기록하고 나를 기록하는 일을 또 간간히 음표처럼 이어 붙여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삶이 안온하다 못해 지루해지는 어느 날 그 음표들이 다시 나를 다음 음표에게 데려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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