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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24. 2019

목덜미가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하는 날

멋진 신세계

여름이면 온갖 무서운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온다. 나처럼 하얀 소복 끝자락만 화면에 등장해도 기겁하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납량 특집의 계절이다. 하지만 날이 추워지면 사람들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겨울은 그 자체로 무서운 이야기이다. 영하의 기온이 점령하는 겨울밤은 귀신 없이도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하다.


<멋진 신세계>는 그 겨울밤에 어울리는 무서운 이야기이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하는 대신 서서히 얼어붙게 하는 이야기. 지금까지 접한 어떤 디스토피아보다 더 무서운 디스토피아가 이 오래된 고전 속에 있다.


싸늘함에 싸늘함이 응답했다. 일하는 사람들은 하얀 통옷 작업복을 걸쳤고, 손에는 시체처럼 새하얀 고무장갑을 꼈다. 빛은 유령처럼 죽어서 얼어붙었다. 죽어버린 광선은 그나마 현미경들의 노란 경통에서 살아 움직이는 어떤 풍요한 힘을 넘겨받았는데,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 원통들을 따라 나란히 배치된 현미경들은 작업대를 따라 길게 줄지어 늘어서서 매혹적인 광채로 무늬를 이루었다.


이야기는 싸늘할 정도로 하얗고 청결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 공간은 ‘부화-습성 훈련 런던 총본부’이다. 인간은 유리병 속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알파부터 엡실론까지 계급이 결정된 채 배양되며 각 계급에 맞는 습성 훈련을 끊임없이 받으며 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 같은 단어는 저속한 금기어나 우스갯소리가 되었고 ‘행복’이라는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 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상태이며, 정확히는 불행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인간은 습성 훈련과 소마(일종의 마약)를 통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당한 채 살아간다.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버나드 마르크스이다. 이름에서 이미 예상되듯이 예민하고 염세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알파 플러스임에도 감마 정도 밖에 안 되는 그의 왜소한 체구에서 기인한다.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그는 체구로 인해 남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그러한 열등감은 그로 하여금 한 발 떨어져 이 사회를 뜯어보게 만든다. 반면 그의 (거의 유일한) 친구인 헬름홀츠는 알파 플러스 중에서도 너무나 독보적으로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남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완벽한 외모와 지능을 갖추고 있으며, 자존감이 높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인물로 헬름홀츠가 아닌 버나드로 택한 것은 작가의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버나드가 지닌 여러 인간적 결함이 사회를 비판하는 이들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흔히 어떤 사회를 비판하고자 할 때 그 사회의 아웃사이더는 완벽한 존재로 그려내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이다. 그래야만 아웃사이더의 고결함과 기존 사회의 비열함이 대비되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버나드는 어찌 보면 한 개인으로서는 대척점에 서 있는 부화-습성국장이나 통제관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외모에 의해 판단되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자신 또한 외모로 타인을 평가하며, 순간적인 성공에 도취되어 경솔하게 행동하여 화를 부르며, 위기에 몰리면 친구에게 감정적 분풀이를 하거나 책임을 전가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여러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헬름홀츠가 그를 좋아하는(또 기꺼이 용서하는) 이유는 아마 독자가 그에게 동조하게 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인간적 결함을 표출하지도 스스로 인지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매끄러운 사람보다는 여러 결함을 지녔더라도 이를 인지하며 괴로워하고 때로는 반성해나가는 사람이 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버나드가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휴가를 가면서부터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축은 그 곳에서 만난 야만인 존이 된다. 그는 오래 전 이곳에 휴가를 왔다가 실종되었던 린다의 아들이다. 야만인의 세계에서 문명인 어머니를 두고 성장하게 된 그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온 문명 세계를 ‘멋진 신세계’라고 부르며 동경하지만, 하느님과 인디언 신화 속의 신성한 영혼들을 믿는다. 그는 얼굴이 검은 원주민들을 경멸하는 동시에 그들 집단 속에 섞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정신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다. 우연히 읽게 된 셰익스피어의 언어들은 그에게 모든 감정의 교본이며 성서이자 나침반이다. 이야기에서 세계와의 갈등을 처음 빚어내는 것은 버나드이지만 극적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인물은 결국 이 셰익스피어(행복보다는 불행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이 뛰어났던)의 후계자, 존이다. 여러 모로 상징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거북할 정도는 아니다. 때로는 어리석고 감정적인 광신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고독하고 용감한 선지자처럼 보이는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며 입체적인 인물이다.


다만 이 놀랍도록 예언적이고 진보적인 이야기에도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바로 여성상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아, 이게 옛날 작품이 맞기는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레니나와 페니의 대화 장면이 등장했을 때 나는 그 끝에 뭔가 이들이 혁명적 여성이 되리라는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했다. 하지만 페니는 그야말로 조연이었고 그나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 중 유일하게 비중이 있는 레니나는 그저 아름다운 외모로 남성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역할, 혹은 누군가의 액세서리가 되어주는 역할 이상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레니나가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여러 남성을 만나는 것을 중단하고 헨리하고만 몇 달 간 관계를 가져왔던 점, 아웃사이더인 버나드에게 관심을 가졌던 점, 존을 만난 후 사랑의 고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점 등을 토대로 했을 때 레니나 역시 충분히 더 혁명적인 인물로 그려낼 수 있었을 법하지만 아쉽게도 레니나의 성장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설령 레니나가 존과의 사랑을 통해 반체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버나드와 헬름홀츠가 자신을 집단 속에 융합되지 못하는 개별적인 존재로 느끼면서 반체제적인 인물이 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는 이성과 철학은 남성들의 영역이고 감성과 애정은 여성들의 영역이라는 고정 관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체제를 엎는 혁명은 최상위 집단이 아닌 최상위 집단이 되기를 열망하는 차상위 집단이 주로 이끌어 왔다. 신분제 사회를 엎은 부르주아 집단이 그러했듯이. 그렇다면 이 신세계에서는 버나드와 헬름홀츠 같은 알파 플러스 집단보다는 베타 집단에서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신분이 알파가 아닌 레니나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꼭 레니나가 아니더라도 베타나 감마 플러스 정도의 집단의 인물들 중에서 비중 있는 인물들이 좀 더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공산주의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면 <멋진 신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I am what I buy. 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아도 이 말이 너무 자주 와 닿는다. <1984>의 세계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디스토피아라면 <멋진 신세계>의 모습은 언뜻 보면 유토피아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자기 위치에 만족하며, 행복과 쾌락만을 느끼며, 과학 기술의 덕택으로 질병도 노화도 겪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섬찟하다. 여기가 정말 우리들의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의 끝일 것만 같아서. 나의 욕망도 자꾸만 <멋진 신세계> 속으로 빨려들고만 있는 것 같아서.


내 삶이 유리병 속에 갇히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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