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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11. 2019

먼지로 가득찬 대기처럼 답답하고 아득해지는 날

아스테리오스 폴립

안개마다 촘촘히 미세먼지가 자욱한 겨울 아침은 어쩐지 세상의 종말을 앞둔 풍경 같다. 그러지 않아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은 아주 설레거나 아주 스산하거나 중 하나인데 날씨마저 이러니 아무래도 마음은 스산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공룡들이 사라진 날의 풍경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태양을 가려버린 먼지 구름과 겪어본 일 없는 음험한 추위. 공룡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가설은 혜성 또는 소행성과의 충돌으로 멸망했다는 알바레즈 가설이다. 오십 번째 생일날 집은 불타버리고 떠돌이가 된 한 남자는 식당에서 이 알바레즈 가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남자는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주인공인 아스테리오스 폴립이다. 그는 극도로 추상적인 사람이다. 이 세상을 이론화하여 분석하고 재규정한다. 저명한 건축가이지만 실제로 그의 설계대로 지어진 건물은 없는 ‘종이 위의 건축가’이다. 마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공룡들처럼.


반면 그의 아내 하나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의 세계는 구체적인 색과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가인 그녀는 머리로 이론을 만드는 대신 두 손으로 휘어지고 또 맞물리는 조형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처음 서로의 다름에 반한다. 아스테리오스의 명료한 직선과 하나의 구불구불한 곡선은 주름 하나 없이 착 겹쳐진다. 그러나 많은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그들은 그 다름으로 인해 상처받고 헤어진다. 그들이 하나로 겹쳐졌던 시간은 쥐라기나 백악기의 시간들처럼 복기할 수 없는 과거가 된다.


불타버린 집에서 아스테리오스는 딱 세 가지 물건만 건져서 나온다. 아버지의 지포라이터, 어린 시절 분해했던 시계, 하나와 함께 바닷가에서 주운 스위스 군용 칼. 그것은 각각 생생하게 자신의 지난 삶의 이미지들을 환기시키지만 그 삶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아스테리오스는 기억의 화석이 된 그 물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줘 버린다. 라이터는 버스 안에서 동승한 사내에게, 시계는 어쩌다 방을 한 칸 빌려 살게 된 집의 아이에게.


하지만 끝내 하나와 함께 주운 칼만은 버리지 못한 채 그녀를 다시 찾아간다. 하나의 작품은 그사이에 바뀌어 있다. 복잡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플라톤의 다섯 가지 입체를 구현한 것 같은 단순한 형태의 작품들이 그녀의 작업실을 채우고 있다. 아스테리오스도 바뀌었다. 한 번도 실제 건물을 지어 본 적 없는 건축가였던 그가 나무 위의 오두막을 제 손으로 짓는다. 둘의 선은 다시 한 번 겹쳐진다. 하지만 그 순간 거대한 소행성 하나가 그들의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린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도무지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장강도도 아니고, 테러도 아니고, 갑자기 떨어지는 소행성이라니. 그러나 한 때 이 지구를 뒤덮었던 거대한 생명체들이 그렇게 갑자기 절멸했듯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느닷없이 균열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토록 많은 영화나 책 등에서 끊임없이 실제로 본 적도 없는 공룡의 이미지들을 복기해내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이빨마저 귀여운 공룡 인형처럼 친근하다가도 문득 까마득한 지층 아래의 흔적들처럼 낯설어진다. 존재했지만 존재한 적 없고, 영원할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절멸해버리는, 삶은 늘 이중적이고 모호하여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무너져 내릴 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 누구와도 완벽하게 합일할 수는 없을 줄 알면서도 합일을 꿈꾸는 것, 그것이 아마 공룡의 뒤를 이어 이 지구에 발자국을 찍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사흘 만에 미세먼지가 다소 가셨다는 소식에 조심스레 또 창문을 열어보듯 마음을 열어본다.



bgm.zunhozoon_사람이 사랑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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