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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25. 2019

그레이 크리스마스,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메리 크리스마스

그 겨울의 일주일

언제나 크리스마스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에 좋은 핑계이다. 그 동안 소원하였던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연말인데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를 건네고, 또 한 해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가벼운 푸념을 서로 주고받는다. 마음에 채여 있던 감정들은 서로 실없는 얘기에 웃어주는 걸로 그렇게 덮어두기로 한다. 캐롤송이 거리를 덮듯이, 눈이 지붕을 덮듯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니까. 그걸 깨달았다면 너도 반쯤은 온 거야.


살다보면 정말 별일이 다 생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에도 별일은 가득하여 내 모든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에게 더 이상은 내 솔직한 감정을 한 톨도 들려줄 수 없게도 되고,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사람과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 서로의 눈동자를 헤아리다 잠들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의 생이란 허무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해서 나처럼 마음이 단단치 못한 사람은 끝내 두렵고 서글퍼진다. 그 두렵고 서글픈 마음을 갈무리하게 해 주는 건 대단히 멋지고 아름다운 말보다는 대개 엄마가 무심히 군고구마 껍질을 까며 해줄 것 같은 그런 말이다. 살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라고.


소설 <그 겨울의 일주일>의 치키는 스무 살이 되던 해 평생을 살아 온 스토니브리지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 우연히 그 곳으로 여행을 온 미국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남자는 변심하여 떠난다. 치키는 미국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고향의 가족들을 속이지만 실은 이후 그녀의 생은 우연히 취직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신파로 흐르기 딱 좋은 이 삶을 치키는 자신의 방식으로 담담히 이끌어 간다. 그렇게 평생을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한 때는 아름다운 대저택이었던 스톤하우스를 다시 아름다운 호텔로 개조하여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던 행복을 진짜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에게 아름다운 ‘그 겨울의 일주일’을 선사한다.


꼭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이 이야기는, 그러나 뻔한 달콤함으로만 가득 채운 케이크 같지는 않다. 아마 바로 이 지점에서 소위 말하는 작가의 역량이라는 게 발휘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디 하나 멋들어지게 쓰려고 힘준 문장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쉽게 술술 읽히는데도 또 어느 한 구석도 가볍지 않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맛을 낼 줄 아는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엮여 만들어낸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스해진 채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도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나홀로집에>나 <러브액츄얼리>처럼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책이 없었다. 아마 이 책을 그 첫 번째 후보에 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혹은 따스한 이야기가 장점이라는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매년 이맘 때 하나씩 차례로 읽어 보는 것도 멋진 일이 될 것만 같다. 삶이 또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혹은 내가 삶을 어디로 데려갈지는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만 이런 따스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 삶의 서사도 언젠가는 따스하게 끝맺게 되리라는 희망을 넌지시 품어보는 일은 역시나,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일이다.



bgm.백예린_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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