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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Oct 14. 2018

구름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날

타샤의 정원

구름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다.


서른이 넘어 내가 깨닫게 된 몇 안 되는 값진 진실 중 하나는 이렇게 맑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보기 좋게 깔린 날이 일 년을 통틀어 몇 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퇴근길 육교 위에서 매일 하늘의 상태를 체크하고 그 날의 산책 여부를 결정한다. 하늘이 예쁜 날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반드시 나간다. 내 가장 낭만적인 즉흥이며 사치스러운 취미라 할 수 있다. 오늘 같은 주말에 날씨가 좋다면? 말할 것도 없이 운동화를 챙겨 든다.


어느 날 구름은 바닷가에 깔린 몽돌이다가, 토실토실한 아기 오리떼의 궁뎅이다가, 춤추는 발자국이다가, 또 어떤 날은 그냥 누군가 실수로 흘려놓은 긴 한숨이다. 이런 구름, 이런 하늘 아래에서는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까. 고심하다 책장에서 <타샤의 정원>을 꺼내 든다.


몇 년 전 서점에서 개정되기 이전의 <타샤의 행복>을 발견하고는 아름다운 표지에 마음이 끌렸었다. 하지만 그 때는 돈을 주고 사자니 그저 잘 꾸며 놓은 가벼운 잡지책을 사는 느낌이라 결국 다시 그 자리에 꽂아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 결국 내 책장에는 새로 개정되어 나온 <타샤의 정원>이 꽂혀 있다. 사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타샤 시리즈가 몇 권 더 있는데 다 사 두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이 책은 사진이 반, 글이 반이다. 심지어 개정판은 글씨도 아주 크다. 적어도 11포인트 혹은 그 이상인데 솔직히 글씨 크기에 관해서는 개정되기 이전이 낫다. 여하튼 어디를 펴든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한다고 해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가벼운 책이다. 아마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일 것이라 생각한다.



타샤 튜더는 미국 북부 출신의 동화 작가이다. 하지만 동화 작가보다는 멋진 정원의 주인으로 더 유명하다. 나 또한 사랑스러운 코기들이 등장하는 그녀의 맑은 수채화 그림들도 좋지만 그녀의 정원을 찍은 사진들이 더 좋다. 물론 고풍스러운 소품들로 가득한 실내 사진들도 좋다. 19세기 옷을 입고 머리 수건 아래로 자연스러운 백발을 드러낸 타샤 튜더나 하얀 골동품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들이 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걸어 다니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뜩 날 서 있던 마음 한 구석이 스르르 풀어진다. 그 사진들 속에 담겨 있는 한없이 느리고 고요한 시간과 계절의 입김이 내 몸 속의 시계태엽도 천천히 다시 되감아주는 것 같다.


가정주부는 찬탄할 만한 직업이에요.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잖아요.

    

타샤는 무엇이 되려 하지 않았다. 다들 꿈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세상이지만 그녀는 위대한 동화 작가가 된다거나, 화가가 된다거나 하는 꿈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심지어 물려받은 유산이 어마어마해서 버몬트 주의 50만 평을 구입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쓰고 그린 동화책 인세로 그녀는 이 자족적인 삶을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는 인생의 끝자락이라 생각하는 쉰여섯 살에.

  

막내였던 나는 늘 혼자 지냈어요.
하기야 누구나 달랑 자기 마음만 있는 외톨이들인 걸요.

   


거대한 정원을 홀로 거닐며 구근을 심고, 물동이를 나르고, 꽃을 따는 타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외로움을 응시할 줄 아는 사람이여서일 것이다. 사람들 틈이 싫다고 하면서도 며칠만 한가로이 보내면 이내 사람들 틈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전원생활을 사실 쉽게 휘발될 로망이다. 전원생활의 현실은 혼자이다. 누군가 찾아오기에는 대개 너무나 고립된 곳에 터를 내려야 하고 사람 대신 흙과, 꽃과, 나무와, 벌레와, 햇빛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타샤와 같은 삶을 살려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무거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물론 교훈조의 문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딱 듣기 좋은 할머니의 잔소리 정도이다.


당신이 새 것보다 낡은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면, 반짝이는 것보다 시들어가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면, 기차의 정방향 풍경보다 역방향 풍경들을 더 좋아한다면, 내일 얻을 행복보다 어제 흘리고 온 행복들을 생각하는 날들이 더 잦다면, 이 중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더라도 그저 지금 좀 쉬고 싶다면 타샤의 책을 권해 주고 싶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타샤처럼 정원의 주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흔히 ‘잿빛’이라고 표현하는 이 도시에도 꽃은 피고, 나뭇잎은 물들고, 가을은 지나가고 있으니까.





bgm. 가을바람_담소네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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