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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an 13. 2019

미세먼지의 온기 속에 갇힌 기이한 어느 겨울날

너무 한낮의 연애

미세먼지는 나쁨, 초미세먼지는 매우 나쁨. 그래서 나의 활동성도 매우 나쁨이 되는 날.

이런 날은 집에 콕 박혀서 책이나 읽는 게 최고이다. 


오늘의 추천 책은 얼마 전에 읽은 <너무 한낮의 연애>. 최강희 주연의 단편드라마로도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생각보다 결이 다양한 책이었다. 이즈음 함께 읽은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 비슷한 결의 이야기들을 짜놓아 어떤 일관된 정서를 증폭시키는 단편집이라면 <너무 한낮의 연애>는 훨씬 더 다양한 결의 이야기들로 제각각의 궁리를 하게 만들면서 정서를 증폭시키는 단편집이었다. 


사족이지만, 요즘 문학동네에서 흥행시킨 일련의 책들(<경애의 마음>과 <너무 한낮의 연애>를 포함한)은 누가 디자인한 건지 정말 영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의 모습과 가녀리고 고전적인 글씨체가 잘 어우러진 파스텔 톤 표지는 정말이지... 최근 유행하는 감성을 정확히 짚어 내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 보면 이 책은 독특한 궤적을 그리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넘겨보기가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슬쩍 넘겨다 본 이 인물들이 삶이 마음에 와 박힌다.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 <세실리아>의 세실리아,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모과장 같은 인물들은 이야기의 시작부에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공식을 지닌 인물들로 등장한다.      



양희는 어제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 중     



그러나 결말에 이르면 그들의 삶을 쉽게 불가해의 영역으로 선 그어버린 시선들이야말로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는 자신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던 것을 사과하러 온 필용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수피가 한없이 벗겨진 나무 같은 사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양희는 관객 없는 무대 위에 그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필용은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잠시 양희의 삶을 스치며 건너다 볼 뿐이지만 그 건너다보는 행위는 그의 마음에도 필적을 남긴다. <조중균의 세계>에서도 조중균 씨의 자리는 끝내 출판사에서 없어지지만 그리하여 그는 ‘없음’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는다.     



하지만 뭐가 있었는가보다는 뭐가 없었는가가 더 세세히 떠올랐다. 거기에는 육 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씨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씨도 없었다. 나태한 조중균씨도 없고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적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씨의 세계였다.

-<조중균의 세계> 중     



<세실리아>의 세실리아는 개인적으로 가장 아린 인물이었다. 어디나 흔히 있는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던 세실리아는 질 나쁜 소문들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동아리 친구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에게 세실리아는 말한다.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아주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말해야겠어.” 세실리아는 그녀가 동아리를 떠나게끔 만든 치운이 사실 남자친구가 아니라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였음을 밝힌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집에서 이런 걸 잊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쪼그리고 앉아 턱턱턱, 구덩이를 파는 세실리아를, 밤의 골목을 옮겨다니며 이미 버려진 것들을 별처럼 줍는 세실리아를,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싶지만 가장 저점의 온도에서도 그러지 못하고 홀로 동결해갔을 세실리아를.

-<세실리아> 중     



외로워 사람들에게 엉기었던 세실리아와 달리 <고양이는 무엇으로 단련되는가>의 모과장은 외로워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는 우는 여자들에게 욕을 하고 하청업체 직원들과 걸핏하면 싸운다. 구조조정의 위기 속에 직원들이 서로 협력할 때도 그는 외따로 군다. 동료니 협력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다. 망치와의 관계, 고양이와의 관계 같은 것들. 



그 간섭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는 며칠을 더 살았고 나중에는 그냥 자기 자신을 고양이에 기탁했다. 어떻게 보면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죽을 수 있는 주체에서 간섭 받는 객체로 물러선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 괴괴한 단독주택에서 움직이고 먹고 눕고 싸고 울고 할퀴는 유일한 생명체였으므로 고양이에 집중하는 것은 삶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냈다.

-<고양이는 무엇으로 단련되는가> 중     



모과장은 고양이의 세계에서도 군집을 믿지 않는다. 잃어버린 고양이들은 길거리의 고양이 군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죽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고양이 탐정’이 된 이유다.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이해되지 않을 모난 삶이다. 물론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모난 삶을 스쳐갈 때 그 삶을 건너다보는 것보다 뒤돌아 외면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고 싶다.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기만 하다 때로는 눈물을 터트리게 만드는 양희의 연극을 이해하고, 구만 육천 원을 위해 굴욕을 감수하는 조중균 씨의 융통성 없는 끈질김을 이해하고, 뜬금없이 웃고 뜬금없이 화를 내다가 구덩이 뿐인 찬 방으로 홀로 돌아가는 세실리아를 이해하고, 고양이가 신경이 쓰여 죽지 못하고 해고자들이 붙이려던 현수막에 마음이 쓰여 툴툴거리는 모과장을 이해하고 싶다. 그래야만 때로는 이들보다 더 불가해한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해하고자 하는 몸짓은 결국 이해받고자 하는 몸짓이다. ‘너무 한낮’의 햇살 속에 그림자 없이 걸어가지만 사실 제 각자의 그림자에 발붙이고 선 우리는, 그래서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다.



bgm. 곽푸른하늘_읽히지 않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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