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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Oct 07. 2018

뺨에는 가을이 불어오고 정수리에는 여름이 내리쬐는 날

여름의 끝

무서울 정도로 덥던 여름은 이제 한낮의 햇살 속에만 아주 조금 남아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찬바람이 불며 때로 기침을 터트리게 한다.


아일랜드의 어느 작고 조용한 마을 사람들에게도 여름은 그렇게 왔다가 간다. 후덥지근하게 들끓던 공기 속에 누군가는 잠시 예기치 못했던 이를 만나고 또 누군가는 관심 없던 이의 삶에 불쑥 끼어든다. 그리고 작은 재채기 소리 같은 기억을 안고 다시 살아간다.


이 작은 마을의 외곽에 살고 있는 한 여자, 엘리. 고아였던 그녀는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내의 가정부로 갔다가 지금은 그 사내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과거의 고통 속에 과묵해진 남편과 여전히 한 뼘 떨어진 곳을 맴돌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어느 날 나타난 한 남자, 플로리언.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유년의 모든 추억이 깃든 저택을 팔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려 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촌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은 듯하다.


두 사람은 모두 외롭고 뿌리를 잃었다는 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마음은 늘 유년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들키지 않게 부유하고 있던 그들의 마음은 그렇게 어느 여름날 우연히 마주친다. 인연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몇 번의 접점으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그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하게 된다. 이 여름이 끝나면 서로를 잃을 것임을 알면서도.


언제나 소설은 얻은 자들이 아닌 잃은 자들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마음은 무언가를 얻었을 때보다는 잃었을 때 더 깊이 흔들리며,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흔들림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의 독특한 점은 으레 러브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여지없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 대신 만나고 돌아온 두 사람이 각자의 상념에 잠기는 장면이 묘사되고, 두 사람이 금기된 선을 넘는 순간 대신 그 선을 넘은 후 엘리가 홀로 침대에 누워 있는 순간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마치 사랑이란 감정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제 안에서 각자 키워 나가는 감정임을 보여주려는 듯이.


단 서로 헤어지는 순간만은 회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이야기의 결말부분에 중요하게 배치해 두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의 삶에 가장 완전하게 가닿았던 순간은 어쩌면 그 이별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책장을 덮고 난 후에도 두 사람의 아스라한 뒷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는 이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벽녘 선선하게 변해버린 공기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는,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그런 아린 뒷모습에 나 또한 며칠간 계절앓이를 하였다.



들리는 것은 엔진 소리뿐, 바다는 고요하고 가을 아침의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다.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다시 열쇠가 판석 위로 떨어진다. 다시 길에서 그녀의 발소리가 들린다.



이 책의 원제는 'summer and love'이다. 원제도 좋지만 다 읽고 나면 '여름의 끝'이라는 국내판 제목 또한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이 시기는 어쩐지 사랑의 뒷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니 이 환절기에,


아주 조금 남은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혹은 누군가를 열망하던 내 추억의 열기가 완전히 식기 전에 이 책을 읽어 보며 한 번 더 아려지는 것도 좋을 일이다.



bgm.잔나비_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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