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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Oct 06. 2018

창 밖에도 책장 속에도 방울방울 비오는 가을날

쇼코의 미소

맑은 대기에 투명한 가을비가 내린다.


뒤늦게 가을이 되어서야 방문하는 올해의 태풍들은 때를 잘못 찾아온 눈물 같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잠복기가 있어서 정작 힘든 순간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한참이 지나 평온한 어느 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질 때가 있다. 잠복기가 길수록 병이 중하듯이 마음에서도 대개 그러하다.


지난해 딱 이 맘 때쯤 나는 퍽 우울했었다. 밖으로 안으로 서성거리던 내 눈에 <쇼코의 미소>가 들어왔다. 사실 이 책은 몇 주 전부터 우리 동네 도서관 대출데스크 옆,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 예쁜 표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파스텔핑크 바탕에 크림색 카디건을 입은 청순한 긴 머리 소녀 혹은 아가씨의 뒷모습, 나는 막연히 달콤한 우울함을 선사하는 서정적이고 잔잔한 수필 느낌의 책일 거라 짐작했다. 내 취향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우울하던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쇼코의 미소>를 빌렸다. 책에 대해 아무런 아는 바도 없었다. 단편소설집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가볍게 뭔가 읽고 싶어 빌린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고,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고, 그러다 열대여섯 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느새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붓도록 울었음을 고백한다. 뻔한 대목에서 뻔한 인물들로 마음을 툭 건드리는데 그게 이상하게 통속적이지 않고, 의도적이지 않고, 가볍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준비되지 않은 자세로 맑은 슬픔 속에 무너져 내렸다. 하루 종일 문 밖을 나서지 않은 어느 고요한 일요일,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 나는 이 책의 표지가 그 안에 담고 있는 문장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시 본 표지 속의 아가씨는 달콤한 우울함이 아닌 건조한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말이 없는 뒷모습이었다. 내 쪽으로 돌아본다 해도 모든 표정이 지워져 있을 것 같은, 그래서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쇼코의 미소>에는 7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모든 이야기의 화자는 여자이다. 그 중에서도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나’는 그 우주의 가장자리에 서서 불빛으로 반짝이는 세상의 중심부를 응시하던 쇼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창백하고 우울하고 어른스럽던 미지의 일본인 소녀, 쇼코. 하지만 쇼코를 들여다보면서 정작 ‘나’가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은 처음에는 이야기의 배경처럼 무심하게 묘사되던 ‘나’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쇼코에게서 온 편지를 핑계로 어느 비 오는 날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 ‘나’에게 어색한 격려의 말을 던지고 다시 빗속으로 우산도 없이 걸어가던 할아버지를 ‘나’는 그제야 들여다본다.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장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줄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나’는 쇼코와 재회한다. 그리고 웃고 있지만 그 속에는 슬픔이 배어 있던, 그래서 ‘나’를 서늘하게 했던 쇼코의 미소와 함께 이야기는 끝난다. 어쩌면 이 책의 모든 이야기에는 이 쇼코의 미소가 어려 있다. 저자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다. 날 세운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슬픔을 꾹 눌러 담은 미소를 띤 채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슬픔을 보여 준다. 일상 속에서 얇은 커튼 한 장만 걷어 내면 볼 수 있었지만 보지 않았던 슬픔들의 속살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덮는다. 그것이 이 책이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지점이다.


<씬짜오, 씬짜오>에서 낯선 독일 생활 중 다정한 이웃이었던 응웬 아줌마는 사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학살로 가족들을 잃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순애 언니의 남편은 고문과 오랜 감옥 생활로 폐인이 되어서야 순애 언니의 곁으로 돌아온다, <한지와 영주>에서 한지는 지능이 두 살에 머물러 있는 여동생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사람들과 마음의 거리를 두고 산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 미진은 집단주의와 남성우월주의가 지배적인 한국의 대학 사회에 상처받고 타지에서 젊은 생을 마감한다. <미카엘라>에서 이 세상 수많은 엄마들은 자신의 미카엘라를 세월호와 함께 잃었다. <비밀>에서 화자는 손녀 지민이 중국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지민 역시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저 잠복기였을 뿐 늘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슬픔이 툭 터져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집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형의 폭력에 대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슬픔,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참고 견디거나 외면하거나 무뎌지다가도 끝내 어느 순간 마음의 둑이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그녀들이 나였거나 나이거나 나일 거라는 느낌이다.


나는 소설을 왜 읽을까. 허구로 지어낸 남의 이야기일 뿐인데 왜 여전히 나는 좋은 소설을 읽으면 비할 데 없이 충만해질까. 내가 좋아했던 말이 있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은 백 번의 삶을 산 것과 같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소 과장과 오만이 섞여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소설은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게 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그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타인의 삶을 응시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응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도 응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하늘에서 맑은 슬픔이 주룩주룩 내리는 날, <쇼코의 미소>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아마 나는 또 펑펑 울 것이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내가 오랫동안 타인의 삶을, 그리고 내 자신의 삶을 응시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 그녀들을, 그리고 나를 안아주고 싶어진다.




bgm. 꽃비_김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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