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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May 18. 2020

빗속에 숨어든 달빛을 생각하는 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며칠째 비가 내리고 안개가 꼈다. 낮에도 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밤에도 달이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습한 회색 하늘 너머에 숨어 버린 달은 무슨 모양이었을까. 음력을 헤아려 보면 그믐으로 가까워지는 반달이었겠지만 그 때쯤의 달 모양을 본 일이 기억에 별로 또렷하지 않다.


또렷하지 않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결국 어떤 패턴을 만드는 것이겠지. 달이 부풀었다 꺼지듯이 내 마음의 패턴도 실은 단순한 것일 텐데 나는 어쩌면 내내 그 단순한 패턴을 읽지 못하고 한 생을 너무 복잡하게 궁리만 하다 보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 부럽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단순한 사람. 예를 들자면, 연인인 듯 친구인듯 애매모호한 관계는 애초에 맺지 않거나 반대로 언제든 그런 애매모호한 관계를 맺었다가 언제든 툴툴 털고 갈 수 있는 사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그 가운데쯤 어정쩡한 사람이다. 연인이 되는 일도 잘 못하지만 친구로 돌아서는 일은 더 못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끝없는 양자택일의 순간과 맞닥뜨리는 일이고, 나는 매번 괴로워진다.


‘우주 알’은 남자를 이루는 패턴의 단순성에 호감을 느꼈다 파도 속에 머물고 있던 우주 알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이야기 속 남자는 자신 안에 ‘우주 알’이 있다고 말한다. 그믐달빛을 따라 지구에 내려온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다고. 어찌 들으면 정신병자의 농담처럼도 들리지만 ‘우주 알’과 하나 된 이 남자는 시간의 선후나 인과, 진실과 거짓을 따지는 대신 자신의 삶을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듯 멀리서 관망하며 살아간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단순한 패턴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 단순한 패턴들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한 작품 앞에서 다음 작품 앞으로 건너가듯 선택한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남자는 한 여자와 다시 만나기 위해 결과적으로는 아주 큰 위험에 빠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남자는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 해도 그렇게 할 것이라 말한다. 여자와의 재회는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패턴이므로. 반면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흉터와 같은 패턴도 있다. 바로 사람을 죽인 기억이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을 죽였다. 죽은 동급생의 어머니는 출소한 그를 쫓아다니며 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진저리나게 괴롭힘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분노로 칼을 휘두르는 대신 순순히 그 괴롭힘에 응하는 쪽을 택한다. 살인자로서 느끼는 죄책감 때문도, 폭력의 피해자로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좀 더 단순한, 상처 가진 자로서 또 다른 상처 가진 자에 대해 갖는 보편적 연민이 거기에 있다.


아직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실 나는 죽은 학생의 어머니가 하는 행동들에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 독자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면 그 뉴스 기사에는 분명 이 어머니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댓글들이 폭탄 투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남자가 죽은 후 혼자 남겨진 여자를 통해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슬픔에 빠져 있던 여자는 어느 날 동창과의 대화를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데,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늘 열등감을 불러 일으켰던 같은 이름의 동창이 사실 학창 시절에는 반대로 자신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따돌림을 당해 힘들어했었다는 사실이다. 폭력의 피해자였던 남자의 곁에 함께 서주었던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의 위치에 서기도 했었다는 마무리에 나는 비로소 조금은 ‘우주 알’적인 시선으로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마음의 문제는 보름달이 뜬 환한 밤보다는 그믐달이 뜬 어렴풋한 밤과 비슷하며, 그 밤의 풍경은 사실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이 이야기의 제목이 알려주고 있듯이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같은 사건을 겪었을지라도 사실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감정적인 옳고 그름을 복잡하게 따지고 드는 일은 대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국 각자의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남은 명백한 진실들은 단순한 것들뿐이다. 한 소년이 상처받았다는 것, 한 어머니 또한 상처받았다는 것, 한 남자에게 한 여자가 소중했다는 것, 한 어머니에게 한 아들이 소중했다는 것,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이들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같은 행동을 하리라는 것.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빛과 어둠 사이에 걸쳐진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이야기를 따라 가며 나는 지난 내 마음의 복잡한 서사들도 들여다보면 전부 단순한 패턴의 중첩이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팠던 마음과 소중했던 마음, 이 두 가지의 패턴들이 때로는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뒤엉켜 왔던 것 같다. 앞으로도 내 안에 ‘우주 알’이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고, 아무래도 나는 쭉 생을 복잡한 궁리들로 보내게 될 것 같지만, 어느 그믐밤에는 나도 좀 더 단순해지고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보태본다.




bgm.김사월_머리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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