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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l 05. 2020

긴 비와 게으름 끝에 마음의 기지개를 펴는 날

내 어머니 이야기

한 달이 넘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비루하지만 변명으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처음 브런치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꽤 가벼운 마음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간단하게라도 감상을 남겨두는 것이 내 몇 안 되는 성실한 습관이니 기왕이면 그 습관의 결과물들을 남들에게 내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연재를 시작해보니 내 글이 정말 나 아닌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하여 의구심이 들었고, 쉽게 문장이 나아가지 않았다. 하여 결국은 한 달에 한 편도 연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구독 중인 브런치 중에 내 브런치가 가장 글이 올라오는 속도가 늦다는 지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브런치에 연재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 대부분은 나와 내 주변의 삶을 풀어낸 에세이들이다. 결혼이야기, 육아이야기, 퇴사이야기, 여행이야기 등등.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일이 참 어렵다. 쓸 말이 없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고 궁금하고 애틋한 법이므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오히려 차고 넘친다. 어려운 건 그 이야기가 남들에게도 조금은 중요하고 궁금하고 애틋하도록 써내는 것이다. 이 지점이 참으로 어려워 늘 썼다 버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우연히 언니의 책장에서 <내 어머니 이야기>라는 네 권짜리 책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무슨 대단한 위인도 아닌 평범한 어느 타인의 연대기에 나는 순식간에 빠져들어 하루 만에 네 권을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내 어머니에 대한 아주 사적인 이야기다. 그 시대를 살아낸 여느 여자들처럼 사연 많은 내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말투,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고향의 음식들을 작가는 아주 세세하게 복기하여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었다.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궁금하고 재밌고 애틋하게 읽히도록 썼다하기에는 불필요한 부분들까지 아주 세심하다.


나는 그 불필요한 세심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지명이나 연대까지 꼼꼼히 확인할 때 작가의 마음은 독자를 위해 엄격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엄격해졌을 것이다. 부끄러울 수도 있는 가족의 개인사까지 낱낱이 어머니의 일대기 속에 포함해 서술할 때 작가는 독자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과 직면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주 늙은 엄마와 늙어가는 딸이 방 안에 나란히 누워 주고받는 지난 이야기에 기꺼이 생면부지의 타인이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쓰게 만든다.


작가의 어머니는 이북 미산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그 곳에서의 유년은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이었던 만큼 혹독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마음껏 아이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대를 피해 마음에 없는 시집을 가고, 625전쟁으로 친정 식구들과 생이별하며 피난을 떠나게 되고, 남한에 와서는 도박에 빠진 남편 대신에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른으로서의 삶은 신산하기 그지없다.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며 일종의 분리를 경험하게 되지만 작가의 어머니는 심리적 분리뿐만 아니라 굳게 닫힌 휴전선을 사이에 둔 공간적 분리까지 경험하게 된 셈이다.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어머니가 되어 여섯 자식을 건사해야 했던 삶은 얼마나 외롭고 무거웠을까. 끝이 처진 눈에 유난히 두툼한 입술로 묘사되는 그 얼굴은 어려서는 사뭇 귀여운 느낌을 주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는 자주 슬프고 지쳐 보인다.


“너희한테는 미안하지만 엄마는 다시 돌아간다면 엄마가 아닌 삶도 살아보고 싶어.”


얼마 전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하셨을 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게, 그렇게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엄마는 내 곁에 엄마로 있다는 게 감사했다. 나름 착한 딸이었다고 자부하지만 착한 딸을 키운다 해서 엄마의 어깨가 무겁지 않았을 리는 없다.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이에 엄마는 이미 결혼해서 나를 키우고 있었으니 얼마나 자주 막막하고 힘들었을까. 시간을 되돌려 엄마에게 엄마가 아닌 삶을 다시 선물해줄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 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로 내게 엄마로서의 삶을 보여주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고, 이제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다른 삶도 살아보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엄마가 엄마라는 존재가 되기 이전의 시간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그녀만의 연대기를 소중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일이 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어머니 이야기>의 김은성 작가가 모든 딸들이 가장 바라는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작품이 처음 출간됐을 때는 반응이 좋지 않아 2014년 이후 절판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김영하 작가의 추천으로 재출간되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작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 어머니의 삶에 대해 궁금한 건 나뿐인가, 타인들에게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넋두리일 뿐인가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내 마음이 최선을 다한 이야기는 시간이 걸려서라도 타인의 마음으로 건너가게 된다.


내가 쓴 글들도 언젠가는 타인의 마음으로 건너가게 될까.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근접치를 느리지만 꾸준하게 추구해 볼 뿐이다.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나와 내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더 끄집어내어 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이번 생은 여기서 더 게을러진다 해도 아예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가기란 그른 것 같으니 조금은 덜 두려워하며 또,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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