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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l 19. 2020

길고 긴 장편소설 같은 한 주를 지나온 날

옥상에서 만나요

짧고 가벼운 단편소설을 읽고 싶은 날이 있다. 길고 긴 장편소설 같은 하루, 혹은 지난한 한 주를 보내고 난 다음은 특히 그렇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유튜브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단편소설집을 즐겨 읽는 이유와 비슷하다. 짧아서. 공부하다 잠깐 쉬는 사이에 영화나 드라마처럼 긴 호흡의 영상을 볼 수는 없으니 몇 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이다. 긴 자맥질 끝에 짧게 숨을 내쉬어 보는 오늘이다.


빗소리에 잠을 깨어 읽고 있던 단편집의 마지막 이야기를 펼쳐 들었다.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라는 책이었다. 정세랑은 요즘 들어 가볍게 무언가를 읽고 싶을 때 가장 자주 찾게 되는 이름이다. 그녀의 또 다른 단편집 <목소리를 들려줄게요>에 이어 <옥상에서 만나요>를 연달아 읽고 있다. 두 단편집 모두 비슷한 느낌이다. 아기자기한 상상력. 기발해서 감탄하게 되는 상상력이 아니라 그 상상력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일상의 마음과 아기자기하게 잘 얽혀 있어서 감탄하게 된다. 몇몇 이야기에서 다소 거칠게 드러나 있는 주제 의식도 그 아기자기함으로 눈감아줄 만하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중 하나인 ‘영원히 77사이즈’만 보아도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그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에 집중하여 서사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그 여자가 새로운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 77사이즈인 자신의 몸에 늘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여자는 더 이상 살을 뺄 수도 찌울 수도 없는 뱀파이어가 된 후 비로소 몸이 아닌 마음(늘 얹혀 있던 첫사랑 같은 것들)을 다이어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겉보기에는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영위하지만 내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흔히 한 사람의 삶을 한 권의 소설에 비유하고는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숨이 가빠 온다. 이야기의 발단쯤에 잘못 찍어 놓은 것만 같은 발자국들과 전개쯤에 찍어두었지만 다시는 가닿을 수 없어 아프기만 한 표지판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오늘에까지 촘촘한 인과 관계로 이어져 있다니 뭔가 옴짝달싹 못하는 기분이다(나만 그런가?).


그렇다고 리셋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픈 건 아니다. 나는 단지 내 삶이 장편소설이기보다는 단편소설집이었으면 한다. 내 삶의 연장선에 늘 있을 줄 알았던 어떤 이야기들을 이제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잘 닫아주고 싶다. 새로운 이야기에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이고, 좀 더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그 이야기 또한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각각의 이야기들이 완결될 때까지는 그 이야기가 전부인 듯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러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기꺼이 아무 연관도 없을 다음 이야기를 펼쳐주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오늘이며 내일이다.


기왕이면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아기자기하게 따뜻해지는 그런 단편집 같은 삶이라면 더 없이 좋겠지.




bgm.잔나비_꿈나라 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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