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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Aug 01. 2020

장마가 아닌 우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날

교실의 시

내가 만났던 중에 나와 가장 비슷했던 한 사람에게만 이 책을 추천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어딘가 내밀한 데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렇게 ‘장마’라는 말보다는 ‘우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오래도록 비구름의 날들이 이어지자 나는 조심히 이 책을 다시 한 번 들춰 본다.


여러 시인들의 시가 엮여 있는 시집을 고를 때 나의 첫 번째 기준은 이것이다. 시에 달린 해설이 최대한 적거나 없을 것. 소위 이름값이 있는 시인이 이런 저런 남의 시들과 자기 시를 섞어 한 데 엮어 놓고 자기 감상을 마땅한 해설인 양 주절주절 적어 놓은 시집을 나는 싫어한다. 시에 대한 모든 해설은 군말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시 한 편 당 열 쪽이 넘게 곁들여져 있는 이 책의 산문들을 아주 소중하게 읽었다. 단 한 편도, 한 문장도 군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이 책이 그렇게 읽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내 정서의 어떤 부분과 똑 맞아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다소 우울한 내용이 많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행복한 우울함을 느꼈다.


나의 불안에 품위를 부여해보는 일. 불안에 먹히지 않고, 불안을 회피하지 않는 일. 내가 가진 고통이 부끄러워 스스로를 은폐하지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일. 잘 불안해하고, 잘 고통스러워하는 일.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용기를 내는 일. 그래야지. 그렇게 할게. 그것이 더 이상 몸이 자라지 않는 사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성장이라면.


깅승일, 김행숙, 김현, 배수연, 서윤후, 서효인, 신철규, 신해욱, 오은, 유진목, 임솔아, 황인찬. 이 책의 시와 산문을 쓴 시인들의 이름이다. 모두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약력을 보니 대개 내 또래의 시인들인 듯했다. 그래서일까. 낯선 이름들이 쓴 낯선 문장들 속에서 나는 낯익은 기억들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재사회화 기관으로서 개개인을 틀 안에 맞춰 넣으려는 의도가 훨씬 더 노골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던 그 때의 교실, 그런 교실 어디에나 있던 정물처럼 조용하고도 예민하던 아이. 한 때 나 자신이기도 했던 그 아이를 오랜만에 떠올려냈다. 선생님이나 친구들 앞에서 반항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반항하기 위해 성장의 온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괴로운 십대 시절의 기억을 나는 서서히 망각하거나 미화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기억을 그대로 껴안고 이렇게 생생한 문장들로 재현하고 있었음에 나는 부끄럽고 부러웠다.


그 사이 학교는 많이 변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임마” 정도의 거친 단어도 잘 쓰지 않게 된 지 오래 되었다. 교복이 불편하여 체육복(물론 사복이 아닌 학교 체육복이었다)을 입고 등교했다고 뺨을 맞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자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 깨우기도 조심스러운 지금이 생경하다. 이제는 변하다 못해 매일 등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교실의 풍경은 아이들에게 내 십대 시절과는 다른 자국들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어쩌면 삼십 년, 오십 년이 더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제 성장을 돌보기에도 버거운 이들이 한 데 부대껴 커나가는 공간에서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청춘’이란 말처럼 말갛게 푸르지만은 않은 감정들. 실은 지금도 여전히 느끼고 있는, 그런 감정들은 우기의 비처럼 내내 축축할 것이다.


나는 무수한 척들을 거쳐 어른이 되었다.




bgm.곽푸른하늘_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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