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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08. 2020

달력의 남은 페이지를 세어 보는 날

올해의 미숙

예전에 근무했던 곳에서 책을 아주 많이 읽으시는 분을 만난 적 있다. 책상 위에는 늘 취향 좋은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책장 사이에 꽂힌 책갈피의 위치는 매일 변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좋은 책을 즐겨 읽는다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분은 자기 몫의 일을 해내는 법이 없었고, 그 점에 대해 전혀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 디지털 세상에도 책은 여전히 묘한 권위를 갖고 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모습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할 일을 거의 없지만 누군가 집중해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뭐랄까, 솔직히 좀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책을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이라면 일단 무조건적인 호감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좋은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일까. 좋은 글을 쓴다고 좋은 사람일까.


<올해의 미숙>에 미숙의 아버지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국문학도였으나 자신으로 인해 꿈을 포기한 아내를 죽도록 때리고, 생계에도 무관심하다.  중학생이 된 미숙은 자신이 쓴 글이 큰 공모전에 당선되었음에도 수상자들이 참여하는 캠프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재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공모전에 글을 내서 수상했다는 걸 알고는 학교를 그만둬 버린다. 미숙은 글을 잘 쓰지만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컨테이너 건물에서 경리 일을 한다. 얼핏 보기에 그녀의 삶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미숙의 학창 시벌 별명이 내내 미숙아였던 것처럼.



그러나 미숙의 시선을 세심하게 따라가다 보면 세상은 미숙을 내내 방임하였음에도 미숙은 제 삶을 방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을 하며 비로소 집에서 독립하게 된 미숙은 아버지가 키우다가 내버린 개를 데리고 함께 떠난다. 똥개 취급을 받던 개에게 새 이름을 주고 더 이상 자기 똥을 핥지 않아도 되도록 매일 사료를 준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돌봐주듯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미숙이 개의 새 이름을 부르자 처음에는 자신의 새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던 개가 비로소 응답하며 쫓아오는 모습이 먹먹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며 살아간다. 비록 끝내 아픈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나쁜 사람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꼭 부여잡는다.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예술 혹은 사상이라 해도 결국 삶의 부속물이 아닐까. 미숙의 아버지가 썼던 시들이 시대를 성찰한 시였든 아니든 어린 미숙이 살아내야 했던 일상보다 무거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숙은 그 무게를 견뎌낸다. 미숙의 아버지는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삭은 뼈로 주저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미숙 역시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나 몸은 언제든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하루는, 혹은 이번 한 해는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고 살아내었다. 이 책의 제목이 <올해의 미숙>인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올해는 어떠했을까. 올해도 이런 저런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나는 그래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었을까. 오랫동안 내 소망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만 요즘의 나는 간절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마다 깨닫는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지만 살아보니 늘 그런 건 아니었다. 깨진 거울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비추어도 깨져 보이기 마련이듯 깨진 마음에는 아무리 좋은 글을 비추어도 곡해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지하철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올해의 미숙>을 읽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슬며시 자리를 양보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bgm.선우정아_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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