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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n 05. 2021

취미는 고민

프로고민러의 삶을 고백합니다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인으로 불리는 유발 하라리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가 온갖 고민을 해대느라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 건 농경시대부터라고 한다. 왜냐고?

  

그 날 그 날의 수확에 따라 살아가던 수렵채집 시절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님들께 미래에 대한 개념은 희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심은 씨앗의 결과물을 몇 달 후에야 확인할 수 있는 농사라는 걸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에게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미래에 대한 개념이 생겼으니 자연스레 앞으로의 일을 미리 계획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앞으로의 일을 미리 걱정하고 고민하는 일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 고민의 역사는 이토록 깊고 유구하다.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조상님들이 나처럼 일평생을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가셨다는 걸 생각하면 어쩐지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고민을 덜하게 되는 건 아니다.


다음은 이번에 파자마 하나를 사기 위해 내가 했던 고민들의 목록이다.


우선 파자마를 살까, 말까? 산다면 추위를 많이 타니까 긴 소매로 사야 할까? 아냐. 그래도 여름이 다가오는데 짧은 소매로 사야 할까?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옷들은 거의 프리 사이즈인데 과연 내 체구에 맞을까? 괜히 일일이 사이즈 비교해보지 말고 그냥 사이즈가 다양한 브랜드 제품을 살까? 브랜드 옷은 세탁기랑 건조기에 막 돌려도 괜찮을까? 어느 정도 가격대가 합리적일까? 아냐, 아냐. 그냥 낡은 티셔츠에 고무줄바지 입고 자면 되는데 예쁜 파자마를 입고 잔다고 과연 그만큼 나의 행복도가 올라갈까? 그래도 나의 로망인 단추 있는 파자마를 입으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좋아. 그럼 이렇게 계속 고민하느니 직접 보고 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언제 어디로 쇼핑을 갈까? 잠깐, 이 시국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쇼핑하러 나가는 게 현명한 일일까? 아, 이번 주에 바쁜데 그냥 왕복 지하철 요금보다 택배비가 싸게 먹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카드 적립이랑 현금영수증 중에 어느 게 더 나을까? 설마 이번 연말정산에서도 몇 십 만원 뱉어내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나는 아직 파자마를 사지 못했다.


들판을 배회하다가 사과나무에 잘 익은 사과가 보이면 손을 뻗어 따먹듯이 그렇게 파자마를 사고 싶다. 몇 만원 되지도 않는 파자마 하나를 사면서 일어날 모든 경우의 수들을 미리 가늠해 보는 프로고민러의 삶이란 참 피곤하다. 아마 나는 농경시대의 수많은 조상님들 중에서도 십년 후의 농사까지 미리 걱정했던 이들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이 글을 바로 발행할지 내일 아침에 발행할지 고민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


나는 오늘도 고민 많은 내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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