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토끼 Sep 07. 2022

아빠는 너무 좋은 아빠였으니까

마른 등을 잠시 기댔던 방석

유튜브를 켜서 SG워너비의 <살다가>를 재생한다. 익숙한 멜로디를 들으며 쪽가위를 집어 든다. 그리고 방석에 바느질해 두었던 고무줄을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한다. 사각거리는 가위 소리가 노래 가사 사이로 섞여든다. 


울다가 울다가 울다가 너 지칠 때 정 힘들면 단 한 번만 기억하겠니...


울지는 않는다. 다만 한 땀씩 실밥을 뜯어내며 그렇게 아빠를 떠나보내는 것만 같다.

방석의 주인은 아빠였다. 이 방석은 오랫동안 아빠의 엉덩이가 아닌 등을 받쳐 주는 역할을 해왔다. 의자가 아닌 변기에서.


어디서부터 아빠에게 닥쳤던 병의 잔인함을 설명해야 할까. 어디쯤에서 덜 힘들게 끝낼 수 있었을까. 근위축성측색경화증, 또 다른 이름은 루게릭병.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줄 알았던 병명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아빠는 얼마나 두렵고 허망했을까.


작지만 다부졌던 아빠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근육과 살을 잃어 갔다. 최소한의 일상마저 차례로 힘겨워졌다. 얼마 전부터는 변기에 잠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어디에 기대지 않고 등허리를 바로 세우는 게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장애인 화장실에 주로 설치되어 있는 등받이 보조기구를 사서 설치하려 하니 아빠는 극구 반대였다. 이제 병이 더 진행되면 방에 변기의자를 두고 써야 하고 결국에는 침대에 누워서 볼일을 봐야 하게 될 텐데 뭐 하러 그걸 힘들여 설치하냐는, 그 모든 하지 않은 말들이 아빠의 반대 안에 담겨 있었다.


그래도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힘들어 하는 아빠를 그냥 볼 수는 없었다. 설치가 간단한 화장실 보조기구를 해외직구로 사서 배송을 기다리는 동안에 식탁 의자에 놓으려고 사두었던 방석이 눈에 들어왔다. 라텍스로 되어 기대기 좋게 두툼한데다가 변기 커버에 매달면 크기가 딱 맞을 것 같았다. 과연 변기 커버를 열고 등과 닿는 면에 방석을 세운 다음 끈으로 묶어 고정하니 그럴싸했다. 엄마가 끈 대신 굵은 고무줄을 방석에 꼼꼼히 바느질해 고정했더니 훨씬 쓸 만해졌다. 아빠는 처음에는 뭘 이런 걸 만들어놨나 하는 표정이셨지만 몇 번 써보시더니 기대기 편해서 좋다고 하셨다. 3주나 걸려 도착한 보조기구보다 오히려 더 편해하셔서 마지막까지도 이 방석은 변기 커버에 매달려 있었다.


아빠, 이제 이거 보내 줄게.


내가 아빠에게 해드린 것들의 크기는 겨우 이 방석 크기만큼인 것 같다. 아빠가 나에게 준 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방석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크고 많은데.


방석에서 떼어낸 하얀 고무줄 두 개가 바닥에 놓여 있다. 이제 이 방석은 다시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받쳐 줄 것이다. 쓸모가 없어진 고무줄은 버려야겠지. 고무줄 끝에 너덜너덜하게 매달린 실밥을 매만져본다.


아빠, 이 방석 덕분에 조금은 더 편했어?


잘 가, 아빠.


고무줄을 쓰레기통에 넣고 이 글을 쓴다. 살다가 살다가 보면 슬픔도 무뎌지겠지. 슬픔을 기억하지 말고 아빠를 기억하자고 씩씩하게 다짐하기도 하겠지. 더러 그 다짐이 지켜지기도 하겠지. 그래도 영영 슬픔을 쓰레기통에 갖다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아빠는 너무 좋은 아빠였으니까. 아빠가 내 아빠라는 사실이 내가 이 생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