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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Sep 08. 2022

자주 아빠 꿈을 꿔

수많은 불면의 밤이 담겨 있을 베개

아빠, 엄마랑 나는 잘 지내.


아침이면 아빠가 있었을 때처럼 청소기를 돌리며 하루를 시작해. 시로가 여전히 털을 밤새 잔뜩 뿜어놓거든. 시로가 결국 아빠보다 더 오래 사네. 아빠가 아프기 전에는 당연히 우리 식구 중 시로가 가장 먼저 떠날 줄 알았는데. 벌써 고양이로서는 꽉 찬 나이인 열다섯 살 시로. 이 녀석의 장수를 바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빠가 조금만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할 수 없이 더 간절했어. 알지? 물론 삶은 간절히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하는 건 아니란 것 역시 아빠는 잘 알고 있었겠지만.


아빠가 이렇게 갈 줄 모르고 얼마 전에 속통까지 깨끗이 빨아두었던 베개 커버


청소기를 돌리면서 아빠가 앉았던 휠체어를 밀어 그 아래도 꼼꼼히 청소해. 안방을 청소하다 보면 여전히 아빠가 베던 하늘색 베개가 놓여 있어. 아빠가 쓰시던 욕창방지매트리스는 치워뒀지만. 하지만 그런 걸 볼 때마다 슬퍼하지는 않아, 아빠. 우린 잘 지내고 있어. 감상에 빠지는 일은 남은 사람을 위한 일이지 아빠를 위한 일은 아닐 거잖아. 참, 아빠 쓰시던 보조기기나 의료용품들은 기부하거나 무료로 다른 환우 분들께 드릴 생각이야. 불가에서는 그게 죽은 이를 위한 가장 좋은 일이래. 무언가를 베풀어 복을 짓는 거. 사실 그거 말고 더는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겠지.


청소를 마치고 씻고 나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일들을 해. 사람이 죽고 나면 뒤따르는 행정적인 절차가 참 많더라고. 엄마가 그걸 다 처리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서 나랑 언니가 같이 하고 있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알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고 나면 시간이 금방 가. 아, 지난 주말에는 추석을 앞두고 미리 장도 보고 왔어. 한동안은 아빠만 두고 집을 비우지 않으려다 보니 거의 온라인으로만 장을 봤잖아. 진짜 오랜만에 간 마트였는데 사람이 정말 많더라. 그렇게 사람 많은 걸 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어.


아빠, 낮에는 아빠 생각을 많이 안 하는 것 같은데 밤에는 자주 아빠 꿈을 꿔. 아빠가 영혼이 되어 찾아온 것 같은 그런 멋진 꿈은 아냐. 그냥 내 무의식이 아직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꿈속에 아빠는 어떤 때는 아팠을 때 모습이고, 어떤 때는 아프기 전 모습이고 대체로 뒤죽박죽이야. 얼마 전에는 거실에 악어가 나타나서 몸 움직이기 힘든 아빠를 물려고 해서 내가 악어 입을 붙잡고 막아서는 황당한 꿈도 꿨어. 웃기지? 난 왜 맨날 말도 안 되는 꿈만 꿀까?


그리고 아빠가 운전하는 꿈도 꿨어. 내가 아빠한테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아빠가 오른팔에는 힘이 돌아왔다고 했어. 여전히 마르긴 했지만 예전에 우리를 뒷좌석에 태우고 주말마다 어디론가 놀러가던 그 때 모습 같았어. 기억 속의 아빠는 늘 뒷모습이었지. 우리를 두고 멀어지는 뒷모습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 있는 뒷모습.


가끔 좀 선명한 꿈을 꾸고 나면 방문을 열고 나가도 아빠가 없다는 게 오히려 꿈같아. 이 꿈에서 깨어나면 아빠가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거 같아. 난 아빠 옆에 쪼르르 가 앉아서 어제 이상한 꿈을 꿨다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아차 하고는 후다닥 입 헹굴 물과 바가지를 가져다 드리는 거지. 엄마는 부엌에 서서 오늘 아침에는 무슨 죽을 드실 건지 물어보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거야. 아빠, 그거야말로 꿈이겠지. 이제 이루어질 수 없는 아주 크고도 작은 꿈.


그래도 이제는 더 안 아프지? 누군가의 고통을 고스란히 삽으로 떠서 내가 가져오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게 도저히 불가능해서 나는 그냥 악어한테서 아빠를 지켜주는 그런 꿈이나 꿔. 그렇게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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