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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 사용 설명서

빨간책은 죄가 없다. 그냥 변해왔을 뿐

by 깜이집사

난 빨간 건 다 싫어한다. 특히 빨갱이 ×새끼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국군 임 하사의 대사 중



북한에 살던 임 하사의 가족은 인민군 손에 몰살당했다.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그의 분노는 그럴만하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대립이 한창였던 1960~80년대, 북한은 나라가 아닌 북한 괴뢰 집단이었다.


1983년 북한 조종사 이웅평은 전투기를 몰고 38선을 넘어 귀순했다. 같은 해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 묘소를 방문한 대통령 일행에 북한은 테러를 자행했다. 코흘리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북괴를 빨간 뿔이 달린 도깨비로 알았다. 국가에서 그렇게 묘사했고, 나도 그들을 반공 포스터에 도깨비로 그렸다. 어린이 반공 교육의 중심에는 이승복이 있었다. 강원도 산골의 아홉 살 소년이었던 그는 인민군의 총칼에 쓰러지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울부짖었다. 월요일 조회 시간,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나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


이러다 보니 이른바 '빨간책'은 우리나라 체제를 위협하는 좌익 불온서적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마르크스 레닌부터 사회주의를 다룬 국내외 도서들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지 못했다. 빨간책은 음지로 점점 숨어 들어갔고 알음알음 읽혔다.


인고의 세월을 겪은 빨간책은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건전치 못한 불온서적에서 야릇하고 뜨거운 외설서적으로 스스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념의 색채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빨간색은 음란과 퇴폐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빨간 빛깔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식욕과 성욕을 돋우는 색이다.


성인용 주말 잡지로, 빨간색 제목이 트레이드 마크인 <선데이 서울>은 우리나라에 외설서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미국의 플레이보이와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남자들의 몸과 마음을 흥분시켜 주기 충분했다. '엄마 알고 싶어요', '탄생의 비밀', '첫날밤의 에티켓' 같은 섹션이 주요 지면을 차지했다. 연예와 결혼, 치정, 불륜에 얽힌 연예인들의 뒷 이야기도 단골 주제였다. 방 안에서 마늘 까거나 목욕탕에서 때 밀며 나눌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인데도, 야릇한 사진과 글로 포장되어 독자들의 관음증을 부추겼다. TV로는 점잖고 건전한 프로그램만 봤고, 끈적거리고 질펀하게 놀아대는 유흥 문화가 금지된 시대였다. 성인들은 말초 신경을 건드리는 빨간책을 보며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였다.


여고생들 사이에선 하이틴 성애 소설이 선생님 몰래 손이 바뀌며 읽혔다. 조잡한 인쇄와 내용임에도 아류작들이 비 온 뒤 잡초 오르듯 나왔다. 남학생 교실에서 빨간책의 강자는 여전히 <선데이서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무렵 폐간되었지만 <선데이 서울>의 아성은 여전했다. 나는 구할 엄두도 못 냈지만 껌 씹으며 교실 바닥에 침 좀 뱉는 애들은 용케 손에 넣고 다녔다. 잡지를 보여달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애들과 어깨를 걸친 채 넘기는 대로 눈에 발랐다.


빨간책에 대한 대중의 사회적 관심은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마 교수는 1992년 강의 도중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징역살이를 했다. 판결의 핵심은 변태적 성행위와 불륜 관계가 소설의 중추여서, 문학 작품으로서 예술성을 잃었고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거였다. 1995년 상반기에 예정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학생 간 찬반이 팽팽히 나뉜 대자보가 교내 곳곳에 붙었던 장면이 선하다.


과한 추측일지 몰라도, <즐거운 사라>의 성애 내용이 요즘은 일상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년 동안 세상이 딸까닥 변한 지금에 비하면 참 웃기고 괴기한 그 당시 판결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처용가>나 <감자>에서도 동심을 파괴하는 대목이 나온다. <북회귀선>이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또 어떻고. 시대를 좀 앞서갔을 뿐인데 억울하게 세상을 등진 마 교수를 떠올려본다.


텍스트가 문화 누리의 원천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하리라 본다. 하지만 지금 대세는 이미지와 영상이다. 빨간책이 불온서적이냐 외설서적이냐는 먼 나라 이야기이고, 숨 죽여가며 몰래 봐야 하는 분위기도 더는 아니다. 빨간책 논쟁이 빛바랜 까닭이다. 세 살 먹은 아기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면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 제쳐가며 화면을 넘긴다. 누구나 손안에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컴퓨터'를 들고 다녀 시공간을 초월하여 너와 내가 연결된다. 외국 문화가 걸러지지 않은 채 물 밀 듯 들어온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마당에 불온과 외설의 경계라는 게 있긴 한 걸까?


그럼에도 빨간책의 강렬함은 여전히 살아있다. 미학과 마케팅 분야에서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빨간색은 눈에 잘 띈다. 붉은 악마, 신호등, 소방차, 소화기 등이 금세 떠오른다. 책표지도 전체를 빨간색으로 하면 단번에 이목을 끈다.


재발간된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사람만이 희망이다>의 표지는 붉은색이다. 출판사의 의도일까? 그런데 최근 그의 시 그림책 <푸른 빛의 소녀가>, 시집 <걷는 독서>는 푸른색이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아이고 머리야. 구질구질 따질 게 뭐 있는가. 그냥 박노해라는 인간의 책일 뿐이다. 그를 노하게 하지 말자. 빨간책은 더 이상 불온하지도 외설스럽지도 않다.


최초의 성인용 주간지 <선데이 서울>을 2020년 초 어느 대형마트가 부활시켰다. 연예 소식, 음식, 책 등을 소개하는 무료 문화 잡지였는데 올해 들어 매장에서 보이지 않는다


MZ 젊은 친구들이여!

빨간색의 강렬함을 탐하자.

맘껏 즐기고 본능에 충실하자.


중년의 동년들이여!

빨간색 앞에서 움찔하지도 숨지도 말자.

이제는 안 잡아간다. 뭐라는 사람도 없다.


노년의 선배들이여!

빨간색이 주는 지난날의 공포와 분노를 잠재우소서.

나이듬과 포용력은 같이 간다고 하니까요.


볼 빨간 십 대 청소년이여!

너희들은 빨간책에 대한 나의 잡설에 이렇게 말할 거지?


어쩌라고. 어쩔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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