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가양역 밖으로 나오니 벌써 8시 50분. 이십 분 사이 일을 마치고 다들 파했는지, 전단지 돌리는 할머니가 한 분 뿐이다.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려는 사람에게 전단지를 건네자 받지 않고 지나친다. 할머니가 쭈뼛거리던 찰나, 내가 먼저 "주세요!" 그러니, 전단지를 건네며 "감사합니다" 하신다.
몇 발자국 걸으며 문득 생각이 스친다.
"저 할머닌 몇 살이나 드셨을까?"
여든이 넘으면 무릎이 성치 않다는 걸 잘 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 서 있기도 여의치 않다. 허리를 꼬부리기도 쉽지 않다. 여든 넘은 할머니에게 전단지 일을 시킬 업주도 없을 듯하다. 예순은 팔팔하다. 예순 언저리인 회사 본부장이나 전문위원을 보면 노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냥 큰 형님이나 막내 고모 같다.
그렇다면 가양역 전단지 할머니들의 나이는 칠십 대일 것이다. 칠십 대라면 법적으로도 겉모습도 노인이다. 일흔 초반이 경로당에 가면 물 당번을 해야 하는 '막내'이지만, 육체적으로 급퇴행이 오는 연령대임에는 틀림없다. 일흔 후반으로 갈수록 등이 살짝 굽고 골반과 무릎뼈가 가라앉아 키가 작아진다. 왜소한 키에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 들릴락 말락한 감사 인사, 전단지를 받아 보면 모두 다른 가게들인데 할머니들의 모습은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다.
벽시계 건물을 지날 때쯤,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와락 돌았다.
외할머니 표정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가 또다시 떠올랐다. 지난 4월이었나, 주민센터가 주는 지원금 신청을 위해 어머니가 당신 명의로 떼놓은 가족관계증명서가 눈에 띄었다. 외할머니가 태어난 해는 1920년. 지금껏 살아계셨으면 103세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였던 여름, 북한의 김일성 사망 보도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그날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삼십 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훤하다. 방학을 하면 도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시골 외갓집에 갔다. 뿌연 흙먼지를 내며 버스가 멈춘 순간부터 나는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할머니를 본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루에 몇 번밖에 안 다니는 버스라 도착시간을 꽤고 있던 할머니는 싸리문 밖에서부터 우리를 기다렸다. 나를 보자마자 엉큼엉큼 다가와 "아이고 내 강아지~" 하며 손등을 꽉 물었다.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볼에 침을 잔뜩 묻혀가며 뽀뽀를 해댔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며칠간 해방이었다. 어머니는 말로만 거들뿐, 밥이며 간식이며 잠자리며 모든 게 할머니의 몫이었다. 평소 어머니가 해준 음식은 저리 가라였다. 가마솥에서 긁어 소쿠리에 담은 깜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싱겁다고 투정을 부리면 할머니는 설탕을 손으로 듬성듬성 뿌려주었다. 고기도 안 들어갔는데 지글지글 부쳐 낸 노릿한 야채 전도 일품이었다. 뒷마당 밤나무의 찰밤도, 꿀 바른 가래떡도, 망둥이 구이도. 어디서 그런 음식들이 끝없이 나오는지 외갓집은 맛의 신세계였다. 밥상머리에서 깨작거린다고 장가 안 간 외삼촌 두 분에게 혼쭐이 나면서도, 할머니가 해주는 별별 간식은 참지 못했다.
예순이 훌쩍 넘었으면 쉴 만도 하지만 검찰청에 근무하는 넷째 삼촌, 염전에서 일하는 막내 삼촌을 위해 할머니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났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떼어 아침밥을 짓고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문지방으로 새어 나오는 백열 전구 불빛에 잠을 깨서 보면, 할머니는 검찰청 삼촌이 입고 나갈 옷을 차렸다. 입속에 넣은 물을 퐈아 하고 와이셔츠에 뿌린 다음 다리미로 몇 장씩 다렸다. 막내 삼촌은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염전으로 떠났다.
다섯 분이나 되는 외삼촌 속에서 혼자 자란 우리 어머니를 할머니는 얼마나 사랑하셨을까. 남자만 득실대던 가족 속 유일한 두 여자였던 할머니와 어머니. 모녀만큼 세상에서 지극히 사적이고 지독한 관계가 있을까. 사랑받고 곱게 자라 여릴만한대도 어머니는 지금껏 강했다. 할머니의 생활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가족을 끔찍이 사랑한다. 노인네가 돼가면서 고구마 같은 답답함이 보이지만 그게 자식과 며느리, 손주를 위해서라는 걸 나는 안다. 해주는 음식이나 근면한 생활 습관, 무심코 뱉어내는 말... 어머니를 보면 외할머니가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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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쯤 되자 할머니는 꼬부랑 늙은이가 되었다. 얼굴도 일흔이 넘은 나의 어머니보다 훨씬 새까맣고 쭈글거렸다. 그런데도 겨울에는 딸과 손주가 추울까 봐 굽은 허리로 아침저녁 아궁이에 불을 때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부어주었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는 지금 우리 어머니와 전단지 할머니들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처녀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더 고되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할머니의 고생길은 길었던 셈이다. 홀로 육 남매를 키워낸 노고가 무거운 짐으로 바뀌어 할머니의 등을 짓눌렀나 싶다.
다행히 어머니는 아직 꼬부랑도 아니고 아파서 누운 채 비실대지도 않는다. 텃밭 일도 혼자 하시고 자주 우리 집에 들러 손주들 간식도 해준다. 그럼에도 이 년 후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이가 된다. 덜컥 겁이 난다. 저녁 자리에서 상추 한 쌈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쭈글거리고 축 처진 볼살, 듬성듬성 핀 검버섯, 눈가의 깊은 주름. 화장을 덕지덕지 했어도 내 눈엔 영락없는 늙은 여인이다.
그렇다. 지금의 내겐, 지하철 전단지 할머니들은 할머니가 아니다. 어머니였다. 이 여자들은 모두 일흔을 넘긴 내 어머니들이다.
자연은 만고불변이지만 인간은 백년손님이라고 했다. 세상에 오는 건 우연이지만 떠나가는 건 필연이다. 쉰을 향하는 나이인데도 나는 옛날 어린 나에 멈춰있었다. 할머니에게 귀여움 받고 외삼촌들에게 투정 부렸던 나는 더 이상 없다. 할머니와 큰삼촌들도 세월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났다. 나도 지금껏 그만큼 더 날들을 보냈다. 다르다면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 나다. 어머니 또래나 연배가 높은 세상 모든 여인들도, 나에겐 이제 어머니다. 할머니는 벌써 없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