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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Jul 28. 2023

키보드와 손가락

새 살 돋는 그날은 언제 올까



< 키보드와 손가락 >


지워져버린 키보드 자판

벗겨져버린 손가락 살갗


얼마나 뜨겁게 부딪쳤길래

둘다 그렇게 없어져버렸나


낮엔 남의 글 쓰느라

밤엔 나의 글 쓰느라


타다다다닥 두루루루룩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새살 돋는 그날은 언제 오려나






낮엔 시간을 갈아 넣어 남의 일을 해주고

밤엔 영혼을 모아놓고 나의 일을 합니다


아래 직원 여럿을 호령하는 위치도 아니고

닭장같이 나뉜 한 평 남짓 열린 자리에서

뭘 아직까지 그리 열심히 할까 회의도 듭니다.

19년 차 회사원이라면 그러려니 해야는데

여전히 부대낌과 불편함이 익숙지 않습니다.


때 되면 승진하고 늦더라도 밀려 올라가며

조직에서 호시절을 누린 7080 세대와 달리

아래위로 이리저리 차이며 나이만 먹어가는

X세대의 비애이기도 합니다.

X 같은 인생 같기도요.

그나마 기업 총수와 일가가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냐며 스스로 위안 삼습니다.


어쩌다 보니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이년 반 넘게 했습니다.

1년 주기로 똑같은 일이 계속됩니다.

보통 1년이면 동서남북이 익숙해지고

2년째 접어들면 슬슬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제 일은 3~6월이 연중 제일 바쁩니다.

기업들에게 부담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기업 한 곳이 적게는 만 원부터 수 십억까지

십 원 하나도 어긋나면 안 됩니다

엄청난 서류, 숫자와 씨름해야 합니다.

마우스 클릭과 키보드 두드림도 상상 초월입니다.

끊임없이 화면을 오르내리고 첨부파일을 열고

한글과 수치를 넣고 뺍니다.


6월에 이르니 키보드 자판 몇 개가 안 보입니다.

닳아서 지워졌습니다.

왼쪽은 ㅁㄴㅇㅊㄷ 오른쪽은 ㅗㅓㅏㅜㅡ

약속이나 한 듯 다섯 개씩입니다.

이미 익숙해져서 자판이 보이든 안 보이든

처넣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

싸구려 새 키보드는 널려있습니다.


문제는 제 손가락입니다.

열 손가락이 조금씩 다 벗겨졌습니다.

엄지는 쭈굴쭈굴하고

지문이 안 보이는 것도 몇 개 됩니다.

재작년도 작년도 손가락 끝이 그랬습니다만

올해 유독 오래갑니다.

돌이켜보니 올 3월 블로그 앱을 깔고

정신없이 글을 쓰며 소통했습니다.

온오프라인에서 손가락이 쉴 틈이 없었습니다.

휴대전화로 썼던 공감과 댓글을 뺐음에도 이러니

키보드를 많이 두드리긴 두드렸나 봅니다.


검지와 중지 양쪽이 갈라져서 유독 아픕니다.

아내가 랩을 조그맣게 찢어와서

손가락 끝에 마데카O을 바르고 감싸줍니다.

이렇게 하고 하룻밤 자면

신기하게 살이 돋아 아침에 한결 낫습니다.

물론 완전한 해결책은 못됩니다.

손가락 지문이 다시 생기려면

휴대전화든 키보드든 덜 누르는 게 답입니다.


근데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브런치까지 시작해서 글과 소통이

더 늘어나버렸으니까요.


전 좋습니다.

낮에 남의 일해주는 것보다

밤에 나의 글 쓰는 게 열 배 낫습니다.

손가락 아픈 게 문제 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래도 살짝 기대해 봅니다

"적어라 얏! 지워라 얏!" 하고 말하면

화면에 따닥따닥 글을 보여주는 기술이

일상이 되길 말입니다.

손가락보다 입이 아파도요.


자판이 지워진 키보드는 지금 내 앞에 없습니다.

드디어 자리를 옮겼으니까요.

손가락은 덜 아픈데 이제 머리가 아픕니다.

영원히 피할 길이 없나 봅니다.


마음을 더욱 비우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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