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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Jun 28. 2023

나도 시를 쓰기로 했다

시는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기록


< 세상에 시시한 시는 없다 >



천하를 가로지르는 기개만이 시더냐

마라탕의 알싸한 신랄함만이 시더냐


일상의 속삭이는 목소리

웃음 부르는 짓궂은 낱말


당당하게 쓰고 내놓자

모두를 기쁨으로 적시자


시는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기록이다





저는 시 무식쟁이입니다.


어릴 적 배운 동시 한 편

주절거리지 못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문학 시간에 읽었던 수많은 우리 시들은

오직 입시용 문제 풀이 대상이었습니다.

시의 주제, 배경, 핵심 정서 등을

'밑줄 쫙' 하며 달달 외웠습니다.

시인과 한마음이 되어보려는 욕심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멋진 시를 놓고

번갈아 읊조리는 일은 꿈도 못 꿨습니다.


성인이 되었습니다.

십 대에 억지로라도 접했던 시와

더 멀어졌습니다.

사회과학도로서

딱딱한 전공 서적에 파묻히고

외국어와 씨름했습니다.

줄이고 줄여야 하는 시의 미학과 달리

글과 생각을 늘리고 늘려야 했습니다.

주제와 이슈가 주어지면

엿가락처럼 질질 뽑아내면서

'썰'을 풀었습니다.

정신없는 진로 변경과 도전으로

정신적 여유로움은 멀어져만 갔습니다.

뛰어 봐야 벼룩이고

아는 지식이래야 뒤꿈치 바늘 피인데도

자기 계발을 끊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국가전문자격증을 따고

외국어 공부도 손 놓지 못했습니다.

박사 학위 과정 동안에는

세상 재미없는 글들과 살았습니다.

고구마를 잔뜩 욱여넣었지만

사이다 한 모금도 마시기 어려웠습니다.

A4 2단 양쪽에 박힌

글자 크기 9 이하인 영어 논문을

몇 년을 읽으며 간추렸습니다.

무리를 했는지

난시가 와서 안경을 썼습니다.

차분하고 고요함 속에서

시를 음미할 시간과 기회가

겐 없었습니다.


마흔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문득 스스로를 돌아봤습니다.

"나는 도대체 뭐 하며 살았나" 하고

'현타'가 왔습니다.

"진짜 내가 있었던가?

남의 인생만 사는 게 아닌가?"

의문스러웠습니다.


우연찮게

정민 선생님이 우리말로 평역 해놓은

한시(漢詩) 관련 책들을 접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한문으로 남겨놓은 주옥같은 시와 산문을

정갈한 우리말로 번역하고

감상을 곁들인 글들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근현대 시를 거슬러

훨씬 과거의 시들을 탐독키 시작했습니다.

점차 저를 찾았고 마음도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원전이 한문으로 된 시를

직접 음미하지 못하는 게 답답했습니다.

한자 교육 마지막 세대여서

중고등 때 한자를 배웠고

현대 중국어를 20년 넘게 공부해 왔어도

한문은 또 다른 세계였습니다.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과 유럽인이

라틴어는 못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한문은 라틴어처럼

'죽은 글'이 아니었습니다.

여태껏 우리 문화와 인식

언어생활 곳곳을 지배해 왔습니다.

제대로 캐내지 못했을 뿐

선인들의 지혜와 통찰이 가득한

텍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재작년부터 십 년 앞을 잡았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문과 고전을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목표 삼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과의 '아빠표 학습'도

한시로 시작했습니다.

쉽게 풀어쓴 <한시 이야기>같이

쉬운 책 몇 권을 골랐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동시집,

유명 시인 등이 묶어 펴낸 동시 모음집도

아들과 열심히 읽었습니다.


저와 아들 모두

배움과 계발이 적지 않았습니다.

동시였지만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부터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시마다 가득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동시에 나오는 우리말 뜻을 찾아보고

느낀 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꼬박 두 해를 함께 했습니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입니다.

사람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으뜸입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간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시작한 블로그에서

저는 전혀 다른 시의 세계를 만났습니다.

박노해, 류시화, 나태주, 정호승, 원태연

동시대 시인들의 시를

여러 이웃들의 포스팅에서 접했습니다.

시를 소개하고 깊고 사색 가득한 글을

덧붙인 '블런치' 작가의 글도 좋았습니다.


아니 어쩜 이렇게 찰지고 마음 때리는

시들을 모르고 살았을까?

나이 때문이라는 핑계를 찾았습니다.


"젊을 때 내가 이 시를 봤다면

별 느낌이 없었을 거야"라고

둘러댔습니다.


"혈기왕성한 이삼십 대에는

인생을 몰랐겠지"라며

다독였습니다.


"이십 대에 읽었던 고전이

백지에 쓰인 하얀 글자뿐이었듯

시도 마찬가지였겠지"라고

위로했습니다.


이게 진짜 사람이 생각해 낸

언어의 구성이란 말인가?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요리조리 부려 쓰는 묘기에 놀랐습니다.


시인과 소설가야말로

글 마술사이자 문학 천재라고 여겼는데

시를 읽으면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난생처음 박노해, 류시화 시인의 시집과

글 묶음집도 몇 권 샀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건

자작 시를 부지런히 올리는

이웃들이었습니다.

유명 시인의 시를 보고 느끼는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는 모습이, 따뜻함이, 슬픔과 기쁨이

행간에 보였습니다.

일상 언어로 풀어나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시인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살며 생각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 갑니다.

희로애락에서 깨달음과 통찰도 얻습니다.

휙휙 지나가는 단상을 응축하여

언어로 묶어내지 못할 뿐

아니 안 할 뿐입니다.


누구의 인생과 생각도

가볍거나 시시하지 않습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지금 제 상사이자

전기공학자인 부장님도 시를 씁니다.

써 놓은 시가 천 편이 넘습니다.

시집 발간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하늘땅을 가르고

동서남북을 휘젓는 기개나

마라탕의 알싸한 신랄함이 있어야만

시가 아닙니다.

대화하듯 말하는 부장님의 시는

소리가 되어 귀에 꽂힙니다.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묘한 낱말과 구성도 시에 곳곳입니다.


일상이 주제이고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들이 시라는 말에

용기를 냈습니다.

시를 쓰고픈 주제넘은 욕심이

자연스레 스멀거렸습니다.

에세이의 축소판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사로움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 족하다

여겼습니다.


시는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기록입니다.


이제부터 저도

시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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