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함의 필요성

by 으나

나: 선생님, 지금 느끼는 허무함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의사 선생님: 허무함도 인생에 살면서 필요한 것 중에 하나예요.

나:??

몇 달 전, 세 번째로 찾았던 정신과에서 의사 선생님과 나눈 대화다. 그때 나는 지독한 허무함 때문에 일상 자체가 무너질 만큼 힘들었다. 당시 일했던 하이볼바 점장 업무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손 놓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긴 시간 동안 겪은 우울증에서 파생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이 허무함이 인생에 필요한 감정이라 말씀하시다니. 나는 그 상황에서 이해하지 못한 채 약 처방을 받고 나왔다.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답변을 스스로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챗GPT 뿡뿡이에게 물어보았다.

뿡뿡이의 말에 따르면, 허무함은 우울함과 다른 감정이라고 한다. 허무함은 마음의 ‘멈춤 버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사람이 너무 힘들게 살면 몸은 이미 고갈됐는데도 마음은 앞으로만 달린다. 그때 허무함이 브레이크를 걸어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맞는 거야? 잠시, 멈춰야 하지 않겠어?’라며 내가 붙잡고 있던 의미 없는 일, 인간관계, 습관 등을 버리게 해 주도록 한다. 진짜 스스로가 무얼 원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때 재정비를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변화의 징조라는 것이다. 내가 당시 허무함을 느꼈던 것은 나의 환경이 나를 지치게 했고 나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하이볼바의 점장으로 주 6일, 하루 10시간을 쉬는 시간 없이 근무했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청소, 발주, 프렙, 메뉴 제조, 하이볼 메이킹, 고객 응대, 서빙을 모두 나 혼자 했다. 외롭기도 했고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내 단골도 생기고 홀서빙만 하다가 메이킹까지 하니까 재미는 조금 느꼈는데, 점점 월급이 제날짜에 나오지 않자 그 즐거움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심지어 사장님이 돈이 없다고 발주를 내 돈으로 해달라고 해서 내 돈으로 발주하기도 했다. 사장님에 대한 신뢰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이볼바에 계속 있는다고 해서 점장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 같고, 무엇보다도 사장님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다. 긴 고민 끝에 우울증으로 인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퇴사했다. 그리고 현재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참고로 마지막 월급도 제날짜에 못 받다가 노동청에 신고하겠다고 말하자 겨우 받았다.)

당시의 허무함은 늪처럼 나를 우울에 빠트리려는 감정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멈춰 재점검하고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가기 위한 신호였다. 참 신기하다. 그토록 죽고 싶어 했던 내가 변화하기 위해, 달라지기 위해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현재 직장은 4.5일제로 남은 시간에는 그림 그리거나 글 쓰는 등 원하는 일을 하며 지낸다. 근무시간이 적어 그만큼 급여가 높지 않지만 월급날에 꼬박꼬박 나오기에 그동안 들지 못했던 적금도 들고, 보험도 들고, 연금저축도 들면서 생활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허무함이라는 감정이 고맙다. 그 감정 덕분에 이직할 용기를 얻었고, 지금의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한 ‘인생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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