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자
올해 4월, 동생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일이다. 나는 20년 만의 부다페스트 방문이었고 동생은 처음이었다. 일정상 우리가 부다페스트를 둘러볼 수 있는 날은 딱 하루였다. 전날 저녁에 도착해서 그 유명하다는 야경만 본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국회의사당을 둘러본 후 트램을 타고 부다왕궁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 근처에서 내렸다.
푸니쿨라는 산이나 언덕 등 경사가 있는 곳을 오르내리는 케이블 열차를 일컫는다. 부다왕궁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게 힘들지는 않지만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경치가 좋기 때문에 동생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또 20년 전 얼떨결에 탔던 푸니쿨라를 한 번 더 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길을 건너기 전, 푸니쿨라 승강장 근처에 관광객이 꽤 몰려 있어서 대기줄인 줄 알았다. 부다성이 워낙 유명한 관광지인 데다 푸니쿨라를 타면 부다왕궁까지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4월이고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많네."
동생에게 그렇게 말하며 승강장으로 다가갔는데 대기줄이 아니었다. 매표소가 한산했다. 사람들은 승강장 앞에서 서성이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일단 매표소 쪽으로 가보았다. 직원이 운행을 안 한다고 알려줬다. 이유를 물었더니 점검 중인데 일주일 후에 재개할 계획이란다. 그는 팸플릿을 주면서 부다왕궁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을 설명했다. 추측컨대 5월부터 본격적으로 관광객이 몰리기 전에 안전 점검을 하는 것 같았다. 하아, 하필이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살짝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동생은 열흘 동안 동유럽 여행을 마친 후 프라하에서 서울로 출국하고 나는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12일가량 머물렀다. 그때 묵었던 숙소가 어부의 요새 근처였다. 숙소에서 나와 어부의 요새로 향하는 길은 청량한 새 울음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즈넉했다. 이때는 일부러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새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어부의 요새에서 국회의사당 전망을 바라본 후 부다왕궁으로 향했다. 부다왕궁에서 바라보는 다뉴브강 전망은 백만불짜리여서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부다왕궁을 내려가다가 문제의 푸니쿨라를 발견했다. 점검을 마친 푸니쿨라가 힘차게 운행 중이었다. 중간 기착지에서 푸니쿨라가 오르내리는 모습과 다뉴브강 전망을 감상하면서 여행은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동생과 일주일만 늦게 이곳에 왔더라면 함께 푸니쿨라를 타봤을 텐데.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잦아들고 해외여행이 재개됐을 때 언니와 나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파리가 처음인 언니는 에펠탑을 보며 환호했고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고흐 작품을 두 번이나 둘러볼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은 온전히 보지 못했다.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는 당연히 못 들어가도 외관은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해서 코스에 넣었는데 울타리에 둘러싸인 성당은 접근이 불가능했다.
"파리 너무하네.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왔는데 노트르담을 못 보고 가다니."
언니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도 아쉬웠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2019년 4월 충격적인 화재가 발생한 이후 아직도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성당을 바라보면서 부디 온전히 복원되기를 기원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지난해 12월 7일 재개관식을 거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9년 화재 이후 5년이 지나는 동안 파리를 여행한 사람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지 못한 셈이다.
2015년에는 나 혼자 스위스를 일주한 적이 있다. 제네바로 들어가 여러 도시를 거친 후 취리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서 한국에서 미리 숙소 예약을 끝마쳤다. 그래서 도시 간 이동 날짜를 바꿀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정해진 날짜에 다음 도시로 떠나야 했다.
알프스 산맥으로 유명한 스위스를 여행할 때는 날씨가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날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 날씨 앱을 다운로드하여서 자주 확인했다. 예보는 수시로 바뀌었다. 하루 전만 해도 맑다고 예보한 날씨가 당일에는 흐림으로 바뀌곤 했다. 하지만 나처럼 코스를 정해놓고 여행하는 사람은 날씨가 나빠도 여행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융프라우 지역에서 발생했다. 대망의 융프라우요흐를 방문하는 날, 다행히 날씨가 맑았다. 구름이 끼긴 했지만 출발지인 그린델발트의 날씨가 좋아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융프라우요흐로 향하는 산악열차로 갈아탔다. 그런데 이때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잔뜩 찌푸린 날씨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융프라우요흐에 내린 나는 눈을 의심했다. 만년설과 하얀 구름이 뒤섞여 어느 것이 눈이고 어느 것이 구름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하면 이해하려나?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버텨봤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는 산악열차는 가격이 비싸다. 스위스패스도 적용이 안 된다. 그렇게 비싸게 티켓을 사서 열차를 한 번 갈아타면서 올라왔는데 아무것도 못 본다고?
당시 스위스로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이미 스위스를 다녀온 지인들이 자신이 찍은 멋진 사진을 보여주면서 융프라우요흐는 꼭 가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파란 하늘 아래 만년설이 빛나는 융프라우요흐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스위스 여행을 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를 말해주는 사진이었다. 나는 누구든 그런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줄 알았다.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 인생(?)에서 큰 마음먹고 준비한 여행이었다. 융프라우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올지도 모른다. 허탈했다.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컵라면을 받아 들고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바라보며 면발이 아닌 우울을 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에 없던 장소에 가기도 하고 꼭 봐야 할 곳을 놓칠 때도 있다. 일정상 포기해야 하는 관광지도 부지기수. 잔뜩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보수공사 중이어서 일부분만 관람하거나 유명한 미술작품이 대여 중이어서 못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 혼자 되뇌는 말이 있다.
"다음에 또 와야겠네."
그렇다. 다음에 또 오면 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가야 할 나라는 많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은 유한적이다. 나이 50이 훌쩍 넘고 보니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지만 세월의 힘을 거스를 수 있나.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운다. 체력이 있을 때 한 곳이라도 더 가보기 위해서.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게 중요하지. 대신 다른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풍광을 볼 때가 더 많았으니 복 받았다고 생각하자.
나는 모든 여행지가 좋았다. 구름에 가려져 아무 전망도 보지 못했던 융프라우요흐도 좋았다. 만년설을 밟았을 때 느낌과 폐부 깊숙이 느껴지던 청량한 공기, 얼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이곳에 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