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백제의 비극을 품고 있는 부여

by 블랙홀릭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에게 백제가 함락된 날, 백제의 수도 부여는 불바다로 변했고 화재는 7일 동안 계속됐다고 합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그래서 백제의 왕궁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요.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고 패망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죠."


20251031_130641.jpg 백제문화단지에 있는 사비성 @부여, 대한민국

10월의 마지막 날, 부여에 있는 백제문화단지를 찾았다. 낮 12시 55분에 도착한 나는 운 좋게 매 시각 정시에 진행하는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출발지인 정양문을 시작으로 사비성과 백제 왕궁의 사찰인 능사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비성을 둘러보고 능사로 가는 길이었다. 관광객 중 한 분이 여기가 백제의 왕궁터냐고 물어봤다. 그 질문을 들은 해설사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런 질문은 6개월에 한 번 정도 나오는 고급 질문"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과 함께 "백제 왕궁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았고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도 없지 않나. 그러니 백제의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라고 착잡해했다.


20251031_133757.jpg 백제문화단지에 있는 능사. 목조 오층석탑이 아름답다 @부여, 대한민국

순간, 가슴이 아팠다. 7일 동안 불타는 마을을 바라봐야 했을 백제인들의 심경이 어땠을까. 전날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바라볼 때만 해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사만 내뱉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봤을 그들의 심경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설마 정말 궁녀가 3천 명이었겠어? 그냥 많다는 의미로 3천 명이라고 했을 거야."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이라는 정자에 올랐을 때 주변에 있던 관광객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백제의 마지막은 당시 왕이 문란한 의자왕이었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다분히 조롱 섞인 이야기뿐이었다.


20251031_140924.jpg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위례성 @부여, 대한민국

백제의 비극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걸까. 챗 GPT의 힘을 빌려 백제의 마지막을 알아봤다.

백제가 멸망할 때는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7세기 중반, 의자왕이 즉위할 때 백제는 강력한 나라였다. 신라의 성 40여 개를 공격해 점령했을 정도로. 하지만 점차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 심해졌다. 또 신라와 당나라가 소위 '나·당 동맹'을 맺으면서 백제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약 1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해상으로 진격했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5만 병력을 이끌고 육로로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황산벌(지금의 논산) 전투가 벌어졌고 계백 장군이 신라군에 맞서 싸웠다.

계백 장군은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5만 대군과 싸웠지만 결국 패했다. 이 전투는 백제의 최후 저항을 상징하는 전투로 유명하다. 황산벌이 무너진 뒤, 나·당 연합군은 빠르게 사비성(백제의 수도)을 포위했다. 결국 의자왕은 항복했고 왕자와 귀족들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로 끌려갔다. 서기 660년, 백제는 이렇게 멸망했다.


20251031_134455.jpg 능사. 백제 건축양식을 고증했다 @부여, 대한민국

지금 부여 백제문화지구의 사비성과 능사 등은 고증을 통해 재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 있던 터에 지은 것도 아니고 넓은 부지가 필요하다 보니 지금의 자리가 낙찰된 것이라고 한다. 능사 뒤편에 있는 고분공원의 고분만 부여지역에서 출토된 것을 이전 복원한 것이다. 나머지 건축물은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불에 타지 않아 남아 있던 석대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건물의 기둥 모양과 높이 등을 유추해서 지었다고 한다.


20251030_144027.jpg 부여의 상징 '금동대향로' @부여국립박물관, 대한민국

현재 부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4곳이 있다. 권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이다. 이 중에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인상적이었다. 강당만 남아 있는 허허벌판에서 오층석탑은 그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아름다운 황금비율이 신기해 한참 동안 쳐다봤다.


20251031_105657.jpg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대한민국

오층석탑은 한때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함락시킨 기념으로 세운 탑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9년부터 5년 간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정림사의 창건(538~660년 추정)과 함께 건립된 탑임이 밝혀졌다.

백제의 멸망 과정을 지켜봤을 오층석탑 입장에서는 그동안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냉혹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251030_164655.jpg 부소산성 내 낙화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마강 @부여, 대한민국

우리 세대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다. 그때는 아무 의문도 들지 않았지만 이제와 생각건대 부여는 신라만큼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중·고등학교가 경주로 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신라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지만 백제와 관련한 역사는 잘 모른다.

올해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려 수많은 외국인이 경주를 방문했다고 한다. 경주는 잠시 외국인에게 양보하고 내국인들은 부여를 방문해 보면 어떨까. 천년의 수도 부여도 경주 못지않게 감동을 안겨줬다. 오히려 백제의 비극을 품고 있어 애틋하고 안쓰러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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