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기차여행? 낭만적이야!

유럽 야간열차를 추천하는 이유

by 블랙홀릭

내가 처음 유럽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은 것은 2003년 여름이었다. 출장이 아닌 개인여행으로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일주일 휴가를 받아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했는데 비행기가 아닌 육로로 국경을 넘고 싶었던 우리는 파리에서 로마까지 야간열차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침대칸이 있대. 누워서 기차여행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야."

나와 후배는 호들갑을 떨면서 야간열차를 예약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여서 외국으로 나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물론 배가 있긴 하다. 하지만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는 게 상상이 안 됐다. 무엇보다 차창 밖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지나가고 기차 안에서 그걸 바라본다니.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더욱이 교통비와 숙박비를 한 번에 해결하니 야간열차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0250416_215614.jpg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야간열차 1인실 @Praha, Czech. 2025

대망의 야간열차를 탑승하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야간열차에 오른 우리는 잠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예약한 6인실은 3층 구조의 침대가 양 옆으로 배치된 형태였다. 그리고 우리의 침대 번호는 중간인 2층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 사이트에서 뭔가를 예약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는 기차 구조도 몰랐고 당연히 좌석번호를 어떻게 지정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2층은 앉아 있기 힘들어 올라가면 그냥 바로 누워야 한다. 물론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야 하는 3층보다는 낫지만 1층이 아니라는 사실에 잠시 좌절했다. 1층 한쪽은 이탈리아 할머니가 앉아 계셨고 한쪽은 비어 있었다. 다음엔 꼭 1층으로 예약하리라 다짐하고 2층에 누웠다. 잠시 후 승무원이 들어오더니 문 잠그는 법을 알려주면서 반드시 문을 잠그고 자라고 당부했다.


3층은 독일인 커플이 사용했는데 이 침대칸에서 유일한 남자였던 3층의 독일인 남성은 자기가 이 방을 잘 지키겠다고 농담을 했다. 승무원은 여권을 걷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돌려주겠다고 말한 후 방을 나갔다. 그리고 2층이라고 투덜댔던 우리는 그 불평이 무색하게도 꿀잠을 잤다. 차창 밖으로 아침이 밝아오는 걸 바라보면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이탈리아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250417_070623.jpg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바라본 풍경 @Hungary. 2025

그리고 올해 4월 나는 20여 년 만에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열차였다. 나는 그동안 나이를 먹었고 이번엔 혼자였다. 그래서 침대칸 1인실을 예약했다. 다인실에서 나만 혼자인 상황이 내키지 않은 것도 있었고 이제 그 정도 호사는 누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서다. 이 야간열차가 인기가 많아 빨리 매진된다는 블로그 글을 보고 3개월 전부터 매일 체코 철도청 사이트를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내가 여행하고자 하는 날짜의 야간열차 티켓 예매가 시작됐고 난 잽싸게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1인실에는 세수 정도는 할 수 있는 세면대가 있었다. 물론 물도 잘 나왔다. 밖에서 순서 기다리며 씻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았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 승무원이 와서 티켓과 여권을 검사한 후 아침식사를 주문받았다.


그 사이 기차 시스템도 많이 바뀌어서 문은 호텔처럼 닫으면 자동으로 잠겼고 카드키로 문을 열도록 돼 있었다. 이제 문이 안 잠겼을까 봐 겁먹을 필요가 없다. 조명등도 켜고 끌 수 있고 콘센트도 침대 위와 아래에 넉넉하게 구비돼 전자기기를 여러 개 충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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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 @Hungray. 2025

흔들리는 기차와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숙면을 취하고 눈을 뜬 시각은 아침 6시였다.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를 올리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 있었다. 날씨가 흐려서 검게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사실 밤에는 밖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침은 달랐다. 스위스처럼 달력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대지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은 이른 아침 풍경은 상큼했다.


아침 8시가 되니 승무원이 아침식사를 가져다줬다. 빵 2개와 커피, 디저트가 단출하게 상자에 담겨있었다. 빵은 딱딱하고 맛도 없었지만 가끔은 맛이 아닌 분위기로 음식을 먹을 때가 있다. 상큼한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기차 안에서 먹으면 맛없는 빵과 커피도 먹을 만하다.


20250417_090010.jpg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야간열차 @Budapest, Hungary. 2025

프라하 중앙역에서 밤 10시 1분에 출발한 열차는 부다페스트 뉴가티역에 다음날 오전 9시쯤 도착했다. 원래 예정시간보다 30분가량 늦은 시각이었다. 야간열차는 일반 기차보다 가격이 비싸다. 오랜 시간 달리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지만 하루 숙박비가 더해진 금액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도시 간 이동거리가 멀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갈 예정이라면 한 번쯤 야간열차를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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