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노동절, 이래도 돼?

셔터 내린 메트로역과 문 닫은 가게들

by 블랙홀릭

파이어족이 된 후 처음으로 올해 봄에 두 달간 유럽에 머문 적이 있다. 그중 프랑스 리옹에서 벌어진 일이다.

리옹은 생각보다 더웠다. 4월 말이었음에도 한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5월 1일이 됐다. 노동절이어서 우리나라도 공휴일이었는데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근로자였던 주제에 5월 1일이 노동절인 걸 잊고 말았다.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떼뜨 도흐 공원이라는 곳에 가기 위해 구글맵을 켰다. 목적지를 검색하니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었다. 다만 '노동절이어서 운행 시간 등이 다를 수 있다'라는 메시지가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아, 오늘이 노동절이구나. 그럼 공휴일이겠네'라며 가볍게 생각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20250501_134517.jpg 노동절 아침 한산한 번화가

숙소 근처에 있는 메트로역으로 걸어가는데 지나치게 거리가 한산했다. 내가 묵은 숙소 근처는 백화점을 비롯해 화장품 가게 등 각종 매장과 레스토랑, 카페 등이 많아 늘 활기차던 곳인데 공휴일이라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목적지까지 갈 수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20250501_155624.jpg 셔터를 내린 메트로 역 입구

발걸음도 가볍게 메트로역 입구에 도착했는데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음? 무슨 일 있나? 사고라도 났나?'

내 상식으로는 환한 대낮에 메트로역 문이 닫혔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됐다. 공사 중이면 그 부분만 바리케이드를 쳤을 텐데 정말 이상했다. 이쪽만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맞은편 메트로역 입구로 가봤다. 거기도 셔터가 가로막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좀 더 큰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서양인 남자가 백팩을 멘 채 메트로 입구를 들여다보는 모습에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돌아서면서 바로 구글맵을 켜는 게 보였다. 나도 구글맵을 켰다. 대중교통편이 검색됐는데 다시 한번 '운행 시간 등이 다를 수 있다'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구글맵도 노동절에는 대중교통 운행이 중지되는 건 모르는 게 분명했다. 구글맵이 일만 똑바로 했어도 내가 덜 헤맸을 텐데.


20250501_140441.jpg 노동절에 대중교통 운행이 중지된 리옹 시내의 모습

'노동절이라 메트로가 안 다니는 거야? 그럼 버스를 타야 하나?'

버스 편을 검색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버스를 한 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트램도 같이 다니는 도로인데 트램도 볼 수 없었다.

'뭐야? 버스도, 트램도 안 다닌다고? 그럼 택시를 타야 하나?'

하지만 택시도 눈에 띄지 않았다.


20250501_140718.jpg 노동절에 한 시민이 전동킥보드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20250501_161239.jpg 론 강변에서 피크닉 중인 리옹 시민들

그제야 이 도시의 광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메운 것은 버스나 트램, 택시가 아닌 일반 자동차였고 오토바이와 자전거는 물론 전동킥보드, 세그웨이, 인라인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등 모든 이동수단이 도로와 인도를 장악한 상태였다. 리옹을 가로지르는 론강 주변에는 돗자리를 펴고 휴일을 즐기는 현지인들로 가득 찼다. 이동수단이 없는 관광객들만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자동차만 돌아다니는 리옹 시내

나는 멘붕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기 이전부터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광경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와.. 이렇게 도시가 마비돼도 상관없는 건가?'

처음엔 황당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이게 선진국인가 싶었다. 대중교통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근로자다. 그들도 노동절에 쉴 권리가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시민이 느낄 불편함을 고려해 그들은 노동절에도 쉬지 않고 일할 뿐이다.


20230826_190048.jpg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불편을 겪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특히 기차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파업으로 인해 운행이 취소되거나 축소 운행되는 경우가 그렇다. 다행히 나는 그런 경험이 없지만 여행객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내가 자주 들르는 포털사이트 내 유럽여행 카페에는 파업이 예고되면 불안에 떠는 글이 주르륵 올라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낯선 외국에서 가장 확실한 교통편이 끊기면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험난해지기 때문이다. 연결 버스 편이 마땅치 않은 경우도 있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탄 후에야 목적지에 겨우 도착하는데 캐리어 등 큰 짐이 있다면 불편함은 몇 배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20250501_142403.jpg 노동절에 구시가지로 몰린 관광객들

대충격을 받은 노동절에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어디라도 가야 했다. 그래서 구시가지로 향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라 슬슬 걸어가 봤다. 왠지 구시가지에 가면 식당이라도 열려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구시가지에 접어들자마자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다들 어떻게 알고 이곳으로 모인 걸까. 구시가지의 모든 식당과 카페와 기념품 매장 등은 정상영업 중이었고 가는 곳마다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도 그들 사이에 섞이며 비로소 안심했다. 간단하게 점심도 먹고 시끌벅적한 구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카페에서 카페라테도 마셨다. 그리고 리옹을 가로지르는 두개의 강, 손강과 론강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20250501_160604.jpg 프랑스 리옹을 가로지르는 론강

리옹의 노동절은 내게 충격을 안겼지만 느긋하게 이 도시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리옹은 파리에 비하면 매력이 떨어지는 도시다. 내게도 부다페스트(헝가리)에서 포르투(포르투갈)를 가기 위해 잠시 들린 도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연 우리나라 도시 중 한 곳이라도 리옹처럼 노동절에 대중교통이 마비된다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그 이전에 대중교통의 하루 운행 중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부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일 것 같다.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어쩌면 모든 국민이 불편함을 조금씩 감수해야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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