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공이 많으면 배를 부순다.
회사엔 전세계 다양한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알바시절 여행할 때는 참 좋았던 각각의 나라들의 이미지가 있었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무표정대신 미소로 인사해 주던 영국 신사, 타임스퀘어에서 헤매던 내게 해맑게 길을 가르쳐주던 뉴요커, 카페 문을 열어주며 크게 인사해 주던 호주 서퍼, 상냥함으로 어서 타라고 캐나다 버스 기사 등등, 역시 선진국은 달라. 나도 이런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샘솟게 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드디어 친절함과 상냥함과 예의를 갖추고 선진 에티켓을 배우며 업무를 익히겠구나라고 김칫국을 들이켰다.
각국의 관계자들과 일하다 보니, 기대와는 한참 달랐다. 내가 운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애써 간직했던 ‘좋은 이미지’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파편들이 모여 더 참신한 그림을 그려냈다.
영국인의 젠틀함? → 우회적이라더니 빙빙 돌다 결국 괴이하고 그로테스크한 말투.
미국인의 자신감? → 알고 보니 “USA=무적”이라는 단순무식 공식.
캐나다인의 친절함? → 국력은 애매한데, 미국과 함께 북미인이라는 명찰은 달고 싶어 하는 이중성.
호주인의 솔직함? → 근본 없는 직설적 고함 퍼레이드, 귀청이 남아날 리가 없다.
이탈리아의 플렉스? → 사소한 실수도 다양한 단어와 몸짓으로 오버 대왕. 파인애플 피자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밀면 몸서리친다.
(이는 특정 국가나 문화를 일반화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닌,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풍자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결국 세계 각국이 한데 모여 펼친 건 글로벌 비즈니스가 아니라 글로벌 블랙코미디였다.
*거기에, 독사 같은 앞잡이는 덤
해리포터 소설에도 말포이처럼 얄밉고 남 괴롭히는 데 일가견 있는 캐릭터가 있듯, 사내에도 그런 비슷한 캐릭터가 있었다.
A는 한국에서 비인기 전공을 택했다가 우연히 해외 유학길에 오르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비인기 전공이 갑자기 국가 전략산업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해외 유학 이력까지 더해져 순식간에 ‘숨은 보석’처럼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비전 없는 연구자”로, 해외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시안”으로 무시받던 그는, 마침내 금의환향한 영웅이 된 셈이었다.
A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외국 임원들에게는 은밀하고 친밀하게 굽실거리다가, 같은 한국인 동료들에게는 180도 돌변해 마치 다른 등급인 양 멸시와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학교에서 배운 가치나 책 속 현인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시기·질투·거짓·아첨이 오히려 출세의 무기가 되었고, 그런 자를 감싸는 우두머리 덕에 그는 더욱 무적이 되어갔다. 시스템과 규정이 아무리 세워져도, 그와 대표 앞에서는 언제나 예외였다. 결국 조직의 체계화를 통한 투명성과 생산성을 바라는 대다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A에겐 특이한 습관(?)도 있었다. 스스로는 부정했지만, 모두가 알고 쉬쉬하던 사실.
흥분하면 목과 어깨를 심하게 흔들며, "취-취-"침 튀는 소리 같은 마찰음을 반복해서 내는 것이었다. 회의 때마다 그가 목을 흔들 때면, 맞은편에 앉은 나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또한 그는 업무 커뮤니케이션에서 치밀함이 돋보였다. 이메일보다 전화를 즐겼다. 기록이 남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었고, 심지어 본인 휴대폰에는 상대방 동의 없이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해 두었다.
회의에서는 늘 ‘용감한 반대자’였다. 누군가 의견을 내면, 준비라도 한 듯 끊임없이 딴지를 걸었다.
“그건 잘못됐습니다.”
“아니요, 그렇게 하면 큰일 납니다.”
“아닙니다. 제 말이 맞습니다.”
A의 목소리가 길어질수록 회의는 산으로 갔고, 동료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인사위원회가 자주 열리고, 사내 투서도 수없이 접수됐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스트레스받고 지쳐서 퇴사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대표는 그를 감싸 안으며 “우리 회사의 진정한 일꾼”이라 치켜세웠다.
그의 무례한 언행과 예상할 수 없는 돌발행동 그리고 사해로 보이는 행위가 나타나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고 임원회의에 회부되었을 때, 아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인사팀이 그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되려 우울증을 호소하며 최근 그가 정신의학과 상담을 받고 있으며 회사와 조직으로부터 세뇌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측은히 여긴 대표는 2주간의 안식휴가를 권하며 휴양지 숙박권까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A의 별명은 돈키호테가 되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비춰보게 했다. 미움으로 마음이 출렁일 땐 명상과 기도로 겨우 다스렸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집요한 괴롭힘과 모함 끝에 회사를 떠난 이들을 위해 위로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한 것만 좇는 그를 위해 화살기도를 쏘아 올렸다.
불쌍하고, 또 불쌍했다.
그는 끝내 자신이 불쌍한 줄도 모른 채, 불쌍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