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에세이] 내 커리어 장르는 블랙코미디 - 3

#3 고소했던 업무의 나날

by 직딩누아르

#3 고소했던 업무의 나날


회사의 일은 언제나 ‘법’과 함께였다.


지구 반대편 외국대표의 감정싸움으로 주변인과 협력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이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법무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법률 지식 또한 늘어난다. (참고로 내 업무는 영업마케팅이다)


사내 변호사와 법무팀 직원을 채용하려 했지만 지원자는 없었다. 급기야 당장 법원에 출석해 서면을 제출해야 하는데,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반강제로 법무 담당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함께 일했던 전임 임원 B였다.

B는 한국 사업장에 없는 외국인 대표를 대신해 직원들을 감시하고 협력업체를 쥐어짜며 성과를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일주일에 이틀, 삼일씩 사업장을 기웃거렸고, 미혼 여직원을 데리고 수일간의 지방 출장을 당연한 듯 동행했다. 야근하는 날마다 삼촌뻘 되는 그가 함께 저녁 식사며 골프 연습장까지 업무 연장의 이름으로 요구할 때마다, 솔직히 골프채로 스윙 한 번 날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해외 유학 한 번 다녀온 적 없으면서도 수려한 영어 실력과 언변으로 외국 유명 금융계를 휘저었고, 대기업과 굵직한 거래를 성사시키며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자신감과 유머 센스까지 갖춰 언제나 승승장구였지만, 여색이 짙고 낭비벽이 심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인격모독성 발언을 남발했다. 사람을 다루는 감각이 부족했고, 결국 따르는 이는 없었다.


외국인 대표와 B의 관계는 독특했다. 국내에 없는 대표의 분신처럼 B는 매일 수 시간씩 전화를 붙들고 보고를 했고, 둘이 함께할 땐 맞담배를 태우며 아내 흉을 보던 철부지 단짝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가 되어 법정에서 팩폭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대표가 한때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회사의 주요 권한까지 내어주었던 그 인물은,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대표의 인사 판단과 그 모자람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였다.


둘의 싸움은 할리우드 저급 잡지 기사처럼 질기고 저속했으며, 상식을 넘어서는 분쟁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시간과 돈만 허비되는 것이었지만, 대표는 화풀이용이라도 소송을 이어가려 했다. 덕분에 나는 법률 용어, 국제법, 계약서, 변호사 같은 내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파고들어야 했고, 직원들이 피하던 일을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아, 고위직일수록 감정만 잘 다스려도 회사 돈 수억은 아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변호사들은 입금 전과 후가 딴판이며, 실제 프로젝트 진행비용보다 변호사 수임료에 회사 자금이 더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도.



악인의 필터를 거치면, 충언도 흉기가 된다


이런 피곤한 조직에도 의외로 동료와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충직한 중간관리자들이 있었다.

좁은 시야로 당장의 이익만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경영진에게 그들은 법규와 도덕적 의무까지 조목조목 짚으며 충언의 이메일을 대표 앞으로 보냈다. 마치 임금께 고하는 대자보 같았다.


그러나 B는 나서서 원문 문단 하나하나를 비틀고 꼬집었다.

사측의 비전과 정당성, 그리고 잘못될 경우 회사를 해칠 집단에 대한 소송 의지까지 논리 정연하게 제시했다. 몇 주 뒤, 용감했던 중간 관리자는 홀로 짐을 싸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몇 년 뒤, 회사를 위해 피 토하는 심정으로 쏟아낸 용기 있는 문장들은 대표와 대판싸우고 쫓겨나간 B의 손에서 순식간에 비난과 고발의 협박문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애인에게 배신당한 여인의 한처럼 복수가 시작되었다. 언론·정부·투자처·이해관계자에게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고, 그 파장은 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결국 회사의 사업 중단으로 이어졌다.

분노에 사로잡힌 경영진은 복수를 다짐하며 임원A가 아닌 죄없는 직원들에게 끝없는 불만, 저주, 증오를 퍼부었다. 그들의 유치하기 짝이없는 더러운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고, 그 소모전 속에서 희생양이 된 건 언제나 직원들이었다.


미움의 끝


미움이 커지면 사람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분노에 사로잡힌 망자가 원한과 증오에 잠식돼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괴상망측한 흉귀로 변하는 장면이 겹쳐졌다.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회사는 결국 회사일뿐, 사랑도 증오도 쏟아부을 대상이 아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남는 건 허탈함과 공허함뿐이다. 쉽지 않지만,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회사와 지금 자리에 대한 미련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더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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