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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은 달 Apr 15. 2022

딸이라서 미안해.

차별. 별일.

*별일 아니면서 별일인 이야기 하나.


나의 첫 아이가 나의 몸과 마음을 통과해 세상에 나오는 바로 그 찰나를 간직하고 싶었다. 태어나는 그 순간 의료진의 입을 통해 성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오직 감독 이름 외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가듯, 아이의 아빠 외에는 성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스포일러 당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초음파 사진을 찍을 때마다 본인의 성별을 곧잘 숨기곤 했다. 내 몸속에서 3킬로 남짓 자라는 동안 그렇게 비밀스럽게 품고 있다가, 태어나는 순간 온전한 서프라이즈를 원했다. 생의 끝을 미리 알고 기대 없이 살아나가는 기분이 두려웠을까. 아무튼 나는 그랬다.


친정아버지는 커다란 미꾸라지 꿈을 꾸셨다. 첫 태몽이었다. 아들이 아닐까 은근히 말씀하셨다. 시어머니는 16주 차 태아 초음파 사진에 찍힌 아이의 두상이 아들이라는 말을, ‘친구’를 통해 들으셨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연락을 주셨다. 전화를 받던 그 순간, 동호대교를 지나 올림픽대로를 타기 위해 곡선의 고가도로를 빙 돌던 그 순간이 끝내 잊히지 않는다. 30주가 다 되어갈 즈음에는 수송아지 꿈을 꾸셨다며 마음속에 아들을 확신하시는 모양새였다.


친정엄마는 이유도 없이 그저 아들이라 믿으셨다. 당신의 환상 속에 아들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행여 아들이 아닌 딸이라면 그분들이 마주하게 될 실망의 크기가 점점 차올랐다. 나의 첫 아이가 그 실망에 첫 발을 딛고 생을 시작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쯤에서 성별을 확인해야만 했다. 검진 때 그런 나의 마음을 내비쳤다. 32주 즈음 확인한 나의 아이는 딸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분들의 환상을 부숴야 했다.


전화기 너머 저 멀리 한숨을 푹 쉬며, 엄마는 짧게 내뱉으신다.


“에휴. 둘째 아들 낳으면 되지”


생애 첫 임신이 부정당하는 기분. 나의 모든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 옮길 수 있을까. 예민한 호르몬이 들끓고 산전 우울이 나를 뒤덮고 있던 그때, 엄마의 아무런 무게 없던 그 문장이 나를 휘휘 감아 저기 어디 블랙홀로 떠미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나도 당신의 첫딸인데.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그러했습니까. 둘째, 아들 낳으셨을 때 그렇게 기쁘셨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아들일지도 모를 둘째를 품고 계셨을 때 나를 저기 어디 시골 할머니 댁에 맡기고 여섯 살이 다 되어서야 겨우 나를 찾아가셨습니까. 물음과 질문들이 차오른다. 본능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공부라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만약 공부마저 못했으면 나는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물론 머리로는 백번 이해한다. 결혼한 시댁에 대를 이을 아들 한 명 안겨드리는 게 며느리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부채감을. 그렇게 종용하는 것이 친정엄마의 역할이라 생각하는 마음을. 그리고 가슴 한 켠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본능을. 그러나 참으로 죄송스럽게도 나는 여자아이를 임신했고, 나의 어미는 그것을 미안해했고, 덩달아 나도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뱃속에 품은 나의 아이가 이 사실을 모르기만 바랬다. 한참을 울었고, 마침 옆에서 이 모든 과정을 목도한 여동생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 언질을 줬다. 엄마는 한마디 더 내뱉으셨다. 딸에게 이런 소리도 못 하면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겠냐며.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그렇게 아령 넓은 딸이 아니라 죄송했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고단했을지 상상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이제 엄마의 아들 타령은 사라졌다. 적어도 지금은. 나 스스로도 가문이라는 환상,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거의 벗어났다. 몸에 새겨진 엄마의 그 한마디가 점점 옅어지기를 바란다. 잘못이 없는 사람을 계속 미워한다는 나의 죄책감도 사라지기를 바란다. 차별의 대물림. 우린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아니던가. 그저 태어나기도 전에 차별 아닌 차별을 받은 나의 아이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차별의 색이 점점 옅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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