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은 달 Jan 13. 2023

금요일의 낮시간

30일 쓰기

“아- 비 냄새!”


건물을 나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는다. 분무기로 뿌린 듯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고 연약한 빗방울이 온몸을 감싼다. 대출한 책들이 젖을세라 바삐 걸음을 내딛는다. 도서관 건물 뒤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에서 스며 나오는 흙냄새, 나무냄새가 내리는 비에 섞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향을 내뿜는다. 깊게 숨을 들이킨다.



비를 핑계로 오늘은 작업실 대신 집에 있기로 결심한다. 어린이집 등원을 마치고 도서관을 들린 후, 한살림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곧장 귀가. 사방에 밀린 집안일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아우성이다. 빌린 책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정리를 해볼까 팔을 걷어붙인다. 우선 빨래로 잠식당한 소파부터 구출하기로 한다. 빨래를 개고 접고 서랍장에 넣고 양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발이 두 개 밖에 없음에 감사하고, 식구는 그나마 네 명임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다음은 거실에 널브러진 아이들 흔적과 장난감을 정리  러그를 접어 올린다. 소파도 옮겨 바닥에 쓸려 들어간 물건들을 구조한다. 오늘의 수확은 사라졌던 양말  짝과 포켓몬 딱지 5. 기뻐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얼마  구매한 빗자루로 집안의  바닥을 쓸어낸다. 고장  무선 청소기를 얼른 고쳐야지, 로봇청소기는 항상 충전해 놓아야지 생각하는 사이 빗자루질을 마친다. 바닥에서 쓰레받기로, 그리고 쓰레기통으로 먼지들은 이동한다.


이제 빨래통에 담겨 차례를 기다리는 세탁물 차례다. 색깔구분 따위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세탁기에 욱여넣고 세제를 넣어 표준코스를 돌린다. 고생 많은 세탁기에게 감사를 표하며 잠시 숨을 돌린 뒤 대망의 주방으로 이동한다. 냉장고 정리를 해볼까. 지난가을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감이 몇 개 남아 채소칸에서 짓무르고 있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상한 감을 죄송한 마음과 함께 비닐에 담는다. 물러진 미나리, 상한 계란노른자 지단, 얼마 남지 않은 소고기장조림, 곰팡이 오른 애호박도 한데 붓는다. 냉장고에 있던 음식은 어느새 음식쓰레기가 되어 비닐 하나가 금세 차오른다.


며칠 전부터 벼르던 일을 어둑어둑한 흐린 바깥을 등지고 하나하나 해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쌓여있는 설거지도 고무장갑 따위 없이 맨손으로 익숙하게 처리한다. 청소하며 생긴 재활용품을 세탁실에 옮겨놓고, 네이버쇼핑에서 오늘만 할인한다는 돼지국밥 10인용 세트를 구매한다. 장시간의 집안일로 지문이 흐려졌는지 생체인증이 되지 않아 비밀번호입력으로 넘어간다. 엄지가 없으면, 아니 손가락이 없다면 생체인증이 어렵겠구나 잠시 생각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황급히 콩나물을 씻어 저녁거리로 콩나물국을 준비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역시 작업실을 갔어야 했나. 갔으면 뭐라도 했을 텐데 싶다가도 금요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집이 깨끗한 것도 썩 기분 나쁘지는 않다. 청소의 묘미는 이런 것일까. 찰나의 행복. 곧 하원시간이지만 이제 빌려온 책을 좀 읽어볼까. 아, 글 하나만 쓰고 읽어야지. 이렇게 금요일 낮시간이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으려나. 그리고 또 앞으로는. 시간과 함께 내가 사라지지 않게, 그리하여 깨끗한 집만 남지 않게 두 눈 부릅뜨고 나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나를 지켜야 한다. 청소 한 번에 너무 거창한가 싶다가도 그리해야만 함을 이제는 안다.



#오늘의일기


작가의 이전글 삶을 사랑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