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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은 달 Jan 12. 2023

삶을 사랑한다는 것

30일쓰기

‘삶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를 사랑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정욕구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인정욕구가 궁극적으로 아이에게 독이 될 수 있으니,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아이로 길러야 한다는 내용이었던가. 어른들은 어떨까. 회사에서 가정에서 인정욕구를 충족해야 한다면 회사에 가정에 목이 매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어야 나의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타인이 부재한다면 바로 설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누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가치평가의 기준이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인 셈이다. 이런 이치를 연애에 매진할 때 알았더라면, 이별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이 샘솟는다. 그러나 한때 그러했던 내가 있기에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마음도 여물었다. 생각하면 모든 경험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귀결된다.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에 한없이 가라앉던 시기가 있었다. 산전우울, 산후우울, 생리 전 우울, 주부우울 등 온갖 대명사로 나를 설명했던 시기. 호르몬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를 그 시기에 나는 온전하지 못했다. 신여성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자라난 환경 덕에 뼛속까지 가부장제의 산물인 나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일정 부분 지나친 업무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후 나는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명칭아래 간간히 일을 하며 남편을 보필하는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다. 평생 먹지도 않았던 아침을 차리고, 신혼의 꿀을 잔뜩 발라 끈적끈적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혼이 끝나갈 즈음,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으니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엄습했다. 임신이 생물시간에 배운 대로 난자와 정자가 만난다고 덜컥 수정되고 착상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남들 다 쉽게 하는 것만 같던 임신도 난임이라는 이유로 각종 검사를 받으며 고장난 몸이라 판정받는 모욕적인 순간들을 견뎌야 했다. 그런 순간들에 익숙해질 무렵 바라던 임신에 출산을 치러냈다. 딸을 낳아 가문의 대는 잇지 못하게 되었지만 뭐 나야 상관없다. 그저 생전 처음인 ‘엄마’의 역할이 생각처럼 녹록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출산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이제 우렁각시처럼 집안에서만 맴도는 요상한 존재가 되었다.


한밤중에 호흡곤란으로 눈이 떠져 그저 이 순간의 고통을 멈추려면 18층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 나를 잡아주고 다독여주던 사람이 없었더라면 돌도 안된 아이를 두고 나는 온전할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었는데 끝이 난 것만 같았다. 나를 둘러싼 주변은 온통 어둡고 적막한데 나 이외에는 모두가 무지갯빛으로 영롱해 보이던 시기였다.


왜. 그때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평생 제거할 수 없는 커다란 과제가, 발목에 묶인 거대한 쇠사슬처럼 그렇게 내 옆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결혼에는 이혼이라는 장치가 있는데, 출산에는 되돌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이 어마무시한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그저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살아가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나 두려웠었다. 정신과 약을 처방받고도 수유가 마음에 걸려 고스란히 보관만 하다 결국 버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렇게까지는 힘들지 않았나. 혹은 내가 살아가는 것보다 내가 낳은 그 아이가 살아갈 모유가 더 중요했었나. 한때 아이의 도시락이었던 나의 판단은 그러했다.



지금으로 돌아와, 고행의 중간중간 기쁨과 환희가 엄마의 삶에 간간히 배치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런 걸일까. 순간순간 절망으로 물들었다가 아이의 웃음소리와 보드라운 살결과 올망졸망한 표정에 일순간 희망의 꼭대기에 자리한다. 그리고 엄마라는 산봉우리 외에도 또 다른 자리에도 올라본다. 한때 사회구성원이었던 내가 다시금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의 선두에 바로 내가 서있다.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삶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사람일 테고, 그 힘을 바탕으로 남도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를.



#오늘은몹시긍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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