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쓰기
잘 시간만 되면 배가 아프다며 ‘엄마손 약손’을 해달라 내복을 걷어 볼록한 배와 배꼽을 내민다. 올해 다섯 살이 된 아이의 배를 쓰다듬다 문득 그 옛날 나의 어린 시절이 소환된다. 생후 10개월 무렵,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할아버지댁으로 갔다. 도통 먹지도 자지도 않아 이대로 안 되겠다며 내리신 할머니의 결단이라 들었다. 어른의 그런 결정에 어린 엄마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는 게, 그때 엄마의 심정을 물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완행열차라 불리던 비둘기호가 정차하는 청도역에서 하루에 두세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마을 초입에 내린다. 거기서부터 2리 정도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면 나오는 시골이었다. 그곳에서 유치원 입학을 위해 부산으로 오기 전까지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드넓은 들판과 곡식이 익어가는 논과 크고 작은 도랑들과 짙고 깊은 저수지와 야트막한 산들이 나의 터전이자 놀이터이자 전부였다. 그때는 시골에도 아이들이 있던지라, 내 또래부터 초등학생 언니오빠들 열 남짓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다니며 커나갔다. 숨바꼭질, 소꿉놀이, 자치기, 왕게임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잊어버렸을 무수한 놀이로 하루하루가 짧았다. 토끼 잡으러 산에 덫을 설치한다던가, 참새를 잡으러 새총을 쏠 때도 우리는 함께였다. 그 긴 시간 동안 토끼도, 참새도 한 마리도 잡아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여름이면 강가에 뛰어들어 할 줄도 모르는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소매자락에 눌어붙은 콧물코팅으로 반질반질해진 옷을 입고 얼어붙은 도랑에 나무합판으로 조악하게 만든 썰매를 타고 놀았다. 언젠가 저수지에 누구누구 집 아들이 빠져 죽고, 우리는 먼발치서 저수지를 응시했다가 돌아서면 잊고 개구리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할아버지댁은 어릴 적 기억에 궁궐같이 넓었다. 웃채, 아랫채, 사랑채, 광, 창고, 화단, 화장실, 토끼집, 텃밭 등 직사각형으로 반듯한 터에 사이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아랫채 방 한 칸에 증조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다.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닭똥도 주워 먹을 정도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 살았고, 그래서 그랬는지 자주 배가 아팠다. 저녁이면 마당 한구석 세면대에 쪼그리고 앉으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나의 작은 목에 수건을 두르고 구석구석 할머니 손을 바삐 움직여 작고 검어진 얼굴을 깨끗이 씻겨주셨다. 밤이면 깨끗한 요강을 준비해 두시고, 바닥에 요를 깔고 나를 누이고 언제나처럼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증조할머니는 곰방대를 피우시며 천수경을 외셨다. 무대장치처럼 자욱했을 곰방대 연기를 배경으로 천수경과 할머니의 따뜻한 손기운을 느끼며 잠이 들곤 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은 그렇게 둘째 아이의 볼록한 배를 통해 재현되었다. 비록 지금은 증조할머니도 곰방대도 요강도 천수경도 모두가 사라지고 없지만,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언제든 소환가능해진다. 무녀독남 아들 나의 할아버지도 길러내고, 손주손녀 네 명을 기르고, 증손녀까지 곁에 끼고 키워야 했던 1912년생 나의 증조할머니 박창식. 당신의 삶은 어떠했었나요. 더 이상 들어볼 길이 없음에 원통하고 애틋하고 그리운 날이다. 부디 그곳에서 천수만수 누리시길.
#키워드에증조할머니가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