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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꼬마 Oct 19. 2023

정신승리와 인지부조화

그 어디쯤에 놓인 감사노트

우울하고 속상한 중에도 감사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게 이 매거진의 존재이유다.

 오늘은 화가 나고 눈물도 났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었다. 베란다에서 사용하던 세탁기를 하루아침에 욕실로 옮겨야 했다.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들어왔건만, 베란다 쪽은 우수관과 하수배관이 노후해서 물이 잘 안 빠지니까 원래 세탁기를 두는 자리가 아니니 욕실로 옮겨달라는 요청을 주민대표 쪽으로부터 받았다.


노후하고 고장 나면 다 같이 돈을 모아서 수리를 하면 될 일이지만, 작은 동네, 작은 아파트에서 연세 드신 분들이 모여사는 곳이어서 선뜻 엄두를 못 내셨다.  빗물 정도는 빠지니까 나만 세탁기를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너무 속상했지만 세탁기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동네분들과 함께 세탁기 옮기기 대작전에 들어갔다.  동네 어르신들이 총출동해서 세탁기를 옮겨주셨다. 하루종일 이 일에 다들 매달렸다.


욕실은 비좁아졌고, 아직 샤워기도 못쓰는 상태에, 수전을 교체하다가 배관도 약간 문제가 생겨서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렇지만 동네 어르신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분들 심정도 이해가 가고, 나한테 미안해하셔서는 다들 발 벗고 나서서 세탁기도 옮겨주시고, 서로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밀감도 생겼다.


사실 엊그제 왔던 수리업자는 나보고 세탁기를 안 옮겨도 된다고, 공용시설이 노후가 됐으면 돈을 모아서 바꿀일이라고 하면서 나보고 절대 옮기지 말라고 하고 갔다.


그런데 세탁기를 옮기기로 한건, 어차피 다들 배관공사를 크게 하실 의향은 애초에 없으신 같고, 배 째라 하면서 세탁기를 계속 베란다에서 쓰면 당장 세탁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겠고, 혼자 사는 나한테는 이 동네 어르신들과 척지지 않고 잘 지내는 게 길게 봐서는 나에게 훨씬 안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이 동네 이 아파트에 아주 오래전부터 사셨던 분들이다. 정말 서로 밥숟가락까지 다 아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이 익숙한 분들이셨다. 그리고 다들 악의 없이 착하셨다.


그래, 나는 오늘 편리한 세탁은 잃었지만 정감 있고 안전한 이웃을 얻었다.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리고.. 이런 걸 심리학적으로는 인지부조화라고 하고, 시쳇말로는 정신승리라고 하며, 긍정심리학적인 접근으로는 감사노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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