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가까워질수록 멀어지고 싶었다. 천천히 오고 싶었지만, 너무 일찍 도착했다. 상상은 했으나 기대는 하지 않았던 곳. 뒤돌아가고 싶지만,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외길. 그 끝에 당도한 숫자는 바로 '마흔'이다.
마흔은 내게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물론 10대에서 20대로,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때도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때의 어둠은 짙지 않았다.
20대의 시작은 ‘축하’였다. 치열했던 학창 시절을 버텨낸 모두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박수였고, 성인이라는 자유를 향한 환호였다. 눈 깜빡할 사이 맞이한 30대의 출발은 ‘환영’이었다. 대학 문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취업 시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과 같았다. 이따금 넘어지고 나뒹굴면서도 앞사람의 그림자를 쫓았다.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목적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목에 건 사원증과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지친 숨을 고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흔이 되었다. 공자는 이 나이를 세상일에 정신을 뺏겨 갈팡질팡하지 않는다는 뜻의 '불혹(不惑)'이라 불렀다. 하지만 애플 신제품 소식이나 GTA 6 출시 예고 영상에 여전히 심장이 뛰는 나에게, 마흔은 불혹이 아니라 ‘당혹(當惑)’이었다.
얼떨떨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안정환의 머리를 떠난 공이 이탈리아의 골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경기장에서 직관한 후 밤새 술을 마시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대전 거리를 뛰어다니던 게 바로 어젯밤일 같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새벽 한 시에 시작하는 월드컵 중계를 과감히 포기하고 내일의 출근을 선택하는 피곤한 동네 아저씨다. 가끔 보는 한 친구는 이제 청바지나 슬랙스 대신 잘 마르고 구김 없다는 등산 바지를 입는다. 바지와는 다르게 잔뜩 구겨진 얼굴로 신세 한탄을 한다. 그 얼굴이 활짝 피는 순간은 이십 년 전 이야기를 할 때뿐이다.
세월이라는 급행열차는 세상 그 어떤 인공물보다 빠르다. 한 번 올라타면 절대 내릴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봐야 한다.
어제가 뿌듯하고 내일이 기대됐던 날들이 있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도전적이었고, 결정은 용감했던 시절. 인생은 하얀 도화지 같았고 내 손엔 총천연색 크레파스를 쥐고 있다고 느꼈던 날들. 불안보다는 기대가, 걱정보다는 설렘이 컸던 내가 분명 존재했었다. 도대체 나는 과거에 무엇을 두고 온 걸까? 노트북을 열고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체력’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였다. 새벽 축구, 점심 농구, 저녁 밴드 연습에 이어지는 술자리까지. 30대 직장인이 되어서도 퇴근 후 농구 코트를 누볐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내가 세운 계획을 내 몸이 거뜬히 소화해 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테니스 한두 시간으로 하루치 에너지가 방전된다. 계획표의 나머지는 '휴식'이라는 핑계로 채워지기 급급하다.
그보다 더 뼈아픈 상실은 ‘감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모르는 게 참 많은 촌놈이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할머니가 해주신 간장 계란밥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내게, 성인이 되어 마주한 음식들은 신세계였다. 감자탕, 소곱창, 초밥, 가츠동, 뼈해장국... 처음 맛보는 황홀함에 "우와! 이게 무슨 맛이야?"라며 눈을 동그랗게 뜰 때마다 선배들은 "사줄 맛 나는 놈"이라며 웃곤 했다. 그 감탄은 서툰 나에게 보내는 스스로의 격려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것은 ‘당돌함’이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도 나는 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하면 더 해보고 싶었고, 낯선 분야에 뛰어드는 걸 겁내지 않았다. 그 무모함 덕분에 단편 영화의 주연도 해보고, 스포츠 캐스터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대단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그 당돌함이 나의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는 불청객들이 채웠다. 의심, 후회, 걱정, 불안, 자기 비하... 보기만 해도 어깨가 처지는 단어들이 내 삶에 쓰였다. 이 칙칙한 단어들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을까? 키보드에서 손을 뗀 뒤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을 감았다. 불챙객들을 지워낼 방법을 고민했다. 노트북 옆에 있는 유리잔 속 얼음이 다 녹아 커피가 밍밍해질 때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못 해."
인생에 지우개는 없다. 기억도, 실수도, 후회도, 굳어버린 성격도 박박 문질러 지울 수 없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세상에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윤홍균 작가의 책 ‘자존감 수업’은 내게 지우개 대신 '수정 펜'을 쥐여주었다.
지울 수 없다면,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로 덧칠하면 된다는 것이다.
수정 펜을 흔든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흉터처럼 남은 후회 위에, 불안으로 얼룩진 마음 위에 하얀 수정액을 바른다. 처음에는 밑색이 비치겠지만,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덧칠하면 된다. 언젠가는 새하얀 여백이 생길 테고, 나는 그 위에 새로운 단어를 쓸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억지로 복원하진 않으려 한다. 눈가의 주름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버렸기에, 스무 살의 당돌함은 이제 내게 맞지 않는 옷이다. 타인의 화려한 삶을 흉내 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동경일 뿐, 내 문장이 될 수 없으니까.
대신 나는, 나만의 악필로 꾹꾹 눌러쓰기로 했다. 문장이 조금 투박하고 글씨는 삐뚤빼뚤하더라도, 오직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려 한다.
마흔의 첫 문장은 비록 ‘당혹’으로 얼룩졌지만, 그 끝은 ‘당당’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내 주머니엔 아직 잉크가 가득 찬 수정 펜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