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져버린 근육, 멈추지 않는 무게
운동이 끝나면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회복이 일어나고, 다음 성장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길러진 ‘버팀의 근육’은 이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운동을 마쳤는데도 여전히 근육에 힘을 준 채 서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은 팽팽하게 굳어 있다.
내가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이 힘은 가장 치열했던 자리에서 만들어진 생존의 기록이자, 스스로 선택했던 하나의 ‘버팀방식’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관성’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관성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책임감’이라는 모습으로 형성된다.
책임감은 도연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다. 회사와 가족, 부모와 자신의 삶까지.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내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그 책임감은 그녀를 유능한 직원으로 만들었고, 외부에서 영입된 상사에게 밀려났을 때도 자리를 지키게 했다. 불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책임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이 그녀의 삶에 깊게 박혀버렸다.
그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곤 했다.
퇴직 이후에도 그 근육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며, 그녀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오늘 회의가 있는데… 준비를 못했어.”
그리고 곧이어,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이제 회사 안 가도 되지.”
직장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몸에 각인되 책임감은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자녀들은 이미 성장했고, 책임의 무게도 가벼워졌지만, 도연은 자신의 하루에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평생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했던 도연에게 여유는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었다.
어떤 이들의 관성은 ‘경계’ 위에서 작동한다.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능력은 곧 안전망이 된다. 그렇게 익숙해진 이들은 자신을 늘 긴장된 상태로 유지하며, 타인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법을 배운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는 하진의 독립심은 그녀를 유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타인이 쉽게 넘볼 수 없는 경계가 되었다.
시대는 변했고 일의 방식도 달라졌지만, 하진은 여전히 그 경계 뒤에 서 있다. 한때 그녀를 지켜주던 자부심은 이제 그녀를 보호하기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관계를 목적이 분명한 효율의 영역으로 인식해온 하진에게, 누군가를 삶 안으로 들이는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 다른 관성은 ‘통제’의 얼굴로 나타난다.
민서는 삶을 '이해되고 정리되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완벽한 가정을 추구하는 강박 속에서 그녀는 관리를 넘어서 삶과 주변을 통제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암 진단과 수술이라는 예상 밖의 사건을 겪으며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그 경험은 오히려 통제를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다시 수치를 기록하고 생활을 세분화하며, 이전보다 더 세게 관리의 끈을 조였다. 이제 통제는 자신의 몸을 넘어 가족의 건강까지 확장되었다.
통제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은 공포 때문이다.
책임감, 경계, 통제 외에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버틴다. 누군가는 절제와 규율이라는 엄격한 틀로 삶을 단속하고, 누군가는 타인을 조정하여 관계와 상황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때로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상황에 자신을 맞추어 순응하며, 때로는 도피와 냉소를 동원하며 어려움을 견뎌내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파도에 맞서며, 우리는 그 단단함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더 오래, 더 세게 버티려 한다.
그러나 삶의 무게중심이 바뀌었는데도 같은 방식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다시 걸림돌에 걸리고 만다.
이제 필요한 것은 힘을 빼는 기술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근육을 이완시키는 일.
그러나 평생을 버텨온 이들에게 그것은 가장 낯설고 어려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버팀방식’은 무엇인가.
그 방식은 여전히 우리를 성장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관성이 되어 발목을 잡고 있는가.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재구성된 가상의 페르소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