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그냥 사라지지 않아.

그들의 셀프 치유전, ‘게임 스탑’

by 라이터 엄마

주린이가 기절할 만한 일이 얼마 전 일어났다. 안전 자산이라 믿었던 내 주식이 쑥쑥 떨어졌다. ‘주식은 인기투표야. 우량주 사면 안 털려’ 라 생각한 순진한 주린이의 뒤통수를 까는 일이 벌어진 거다. ‘하락장에 장사 없다던데, 나는 정말 막차를 집어탄 건가, 역시 안 하던 짓 하면 망하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리 시가 창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내가 할 일이 없을 땐 일단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보니 우량주건 뭐건 나한테는 손해가 별로 없다. 워낙 넣은 돈이 적다. 속이 쓰렸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기사가 쏟아진다. 주식 시장 역사에 길이 남을 ‘게임 스탑’ 사건이다. 7달러 앞뒤를 오가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10달러도 아니고 100달러도 아니고 300달러가 넘게 뛰는 일이 일어났다.


사건은 전말은 이렇다.


시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쩔쩔매던 한 게임 대여 업체가 있었다. 우리 기억 속의 동네 비디오테이프 가게 같은 거란다. 전국에 이미 체인점은 깔려있고, 늦었지만 인터넷 시대에 맞춰 조금 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회사에서 게임 빌려 놀던 꼬마들이 개인 투자자가 되어 이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다. 주가가 아주 조금 올랐다. 헤지 펀드들 그러니까 월스트리트의 거대 투자자들은 ‘이거 될 리가 없다, 떨어진다. 니 들이 뭘 아니?’라고 코웃음을 치며 공매도로 베팅했다. 그것도 유튜브 영상 편지까지 날리면서. 개미들은 열이 받았다. 레딧이라는 커뮤니티의 주식 방에서 공매도 세력을 잡아버리자고 연대가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그 망해가던 회사의 주인과 그 연대의 시창자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는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얘기다. 그 와중에 헤지펀드들이 우량주 주식을 팔아 총알을 마련하면서 그 전장 근처에도 안 간 소심이 나한테까지 나비효과가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공매도’가 이슈였다. ‘공매도 재개를 앞두고 개미들이 벌벌 떤다’는 뉴스가 주르륵 나왔으나, 5월에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공매도라는 게 간단하게 ‘남이 돈을 잃을 때 돈을 버는’ 거다. 한정된 주식을 인기투표로 값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돈을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기는 게 주식 시장 룰인데, 주식을 수수료만 내고 빌려다가 비싸게 팔고 싸게 사서 빌린 걸 갚는다. 개인이 어느 주주한테 가서 주식을 빌려올 수 없으니, 펀드들만 할 수 있다. 법으로는 개인도 할 수 있다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주가 떨어지는 데 내 1주 건다’ 하는 ‘풋(put)투자, 혹은 인버스(inverse)’ 투자 정도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선전포고를 날린 펀드사 대표의 사과 영상을 받아내며 개미들이 승리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 마음이 저리다. 오래된 추억의 게임가게를 지켜주고 싶었던 게 아니란다. 재수 없는 먹물들 잡자고 개미 들이몰려 간 게 다가 아니다. 한 세대의 오래된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셀프 치유 전’ 같은 일이었다.


‘레딧’ 게시판에서 일어난 이 개미들의 연대는 ‘돈’ 문제만은 아니었다. 물론 공매도 물량이 많다는 걸 잡아낸 꾼들이 시동을 걸었고, 나중에 돈 벌자고 들어간 사람들의 총알이 뒷배가 되어서 가능했다. 그런데 어쩌면 진짜 트리거는 지금은 성인이 된 ‘2008년의 아이들’이었다.


2008년에는 미국의 거대 투자사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 사태가 있었다. 멀리서 보면 월스트리스트의 부도덕한 공룡 한 마리가 무리하게 이것저것 먹어치우다 파산한 정도의 일 같지만, 그 공룡은 미국 이 동네 할아버지의 퇴직 연금을, 옆 동네 아빠가 평생 한 주 한 주 산 주식들을 죄다 끌어안고 쓰러졌다. 멀리 싱가포르에서도 ‘해고’는 남의 회사 일 같던 한 독일계 대기업에서도 한 부서의 절반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남편은 떠나는 동료들 보기를 어려워했고, 우리 부부는 한동안 그 얘기를 꺼렸다.


헤지펀드에 평생 번 돈을 맡겼다 잃은 가정들, 회사가 파산해 가정의 수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가정들의 상처가 게시글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왔다. 토마토 살 돈이 없어서 토마토 케찹으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어느 가장은 삶을 포기했고, 남은 가족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돈이 없었던 게 아니다. 노력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배신감을 누르고 ‘운이 나빴다’던지 ‘내가 무지했다’고 꾹꾹 누르고 살아온, 평생 주식이라는 걸 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람들이 사태 2일 차부터 몰려들었다. 개인적으로 겪지 않은 이들도 그 상처에 공감하며 이 전쟁에 참전했다.


상처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정혜신 선생님이 그러셨다. 충분히 아파야 다시 일어난다고. 이들은 다시 일어날 기회, 혹은 아파할 시간 따위를 갖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가난의 굴레에 빠졌다.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병원비도 내지 못하는, 길거리에 나가 식량 배급을 타다 먹어야 먹을 것이 있는 미국 사회에서 13살 더 어린아이인 채로 말이다. 2년 기한의 전세보다 무서운 주 단위 혹은 월 단위의 집 계약이 아마 이 아이들의 목을 짓눌렀을 거다. 그래서 나는 이 전쟁의 끝이 기쁘다. 같은 일은 반복될 테고, 주식 시장에 어떤 나비효과가 지속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깊이 파였던 상처가 조금은 흐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1998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IMF를 빠르게 빠져나온 한국 사회에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 직장 생활을 하다 자의로 퇴사했다. 내 능력보다는 운이 좋았다. 불황을 피해 가며 40대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우리에게도 98년의 아이들이, 2008년의 아이들이 있을 거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 싶다.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코로나의 아이들에게는 이 상처가 너무 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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