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흔적 없이

나의 지옥 여행기

by 검은토끼

이쯤 되면 세상이 내게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하다. 뭐 하나 사소한 것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태클이 걸리고 나만 자꾸 넘어진다. 아침에 올린 기안문은 아직도 최종 결재가 나지 않았다. 숨이 찬다. 조용히 울리는 키보드 소리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사무실을 나와 건물 밖을 걷는다.



물살이 센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은 마음과, 미련과 후회로 가득한 한숨에 가려진 해묵은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이상한 걸까? 그렇다면 나만 사라지면 끝나는 걸까?



자리로 돌아와 흐트러진 마음을 억지로 정리한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재시스템 속 노란색 폴더가 열려있다. 결재자가 문서를 확인했다는 표시. 하지만 승인은 없다.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해 보지만 상태가 달라지지 않는다. 불안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신호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XXX실이다. 내려오란다. 손 끝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수첩과 필기구를 들고 내려갔다.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어디쯤에 있어야 하는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역시나, 그 사건 때문이었다. 메일로 먼저 보고 드렸던 건이며 그럴 의도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몇 번의 문답이 더 오고 갔으나,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귀 속에서 울리는 이명이 그의 말을 집어삼켰다.



자리로 돌아와 호흡을 잡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키보드로 꾹꾹 마음을 눌러가며 팀장에게 간단히 보고를 하고 복도로 나와 바로 심리검사일자를 변경했다. 평일 중 가장 빠른 시간으로.



억울한 마음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깟 출장이 뭐라고 준비하는 내내 이런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평일에 시간을 내지 못하고 토요일로, 그것도 3주나 지난 시점에 검사를 진행한다 했었는지. 괜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괜찮은 척 수습해보려고 했던 스스로가 정말 불쌍하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버거웠다.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다. 왜 그러냐 묻는 가족의 말에 서러움만 더해진다. 눈물범벅인 채로 웅크린다. 숨 쉬는 것도, 눈을 뜨는 것도 힘들다. 눈을 감은 채 점점 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