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오늘처럼 날씨가 춥고 흐린 날에는 백석이 생각난다. 서러움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시 때문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분명 백석의 시를 배웠을 텐데, 어느 시점에 어떤 시를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내 감성이 교과서 속 시에 이입할 만큼 예민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졸업한 이후에는 더더욱 시를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시보다는 소설을 훨씬 좋아했고, 호흡이 짧은 시보다는 긴 소설이 더 진한 울림을 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부러 시집을 찾아 읽지 않았기에, 내가 기억하는 시라고는 '손끝으로 원을 크게 그려봐, 그걸 뺀 만큼 너를 사랑해'와 같은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도 한참 시간이 지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학창 시절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 소설, 고전문학 등을 제대로 접하게 되었는데, 백석의 시를 배웠던 그 시간이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여인이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을 역순행적 구성 방식으로 보여준 「여승」이라는 시였는데,
길지도 않은 시에 한 사람의 기구한 인생을 이렇게 충분히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처음 본 여인의 지난 삶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에 놀랐고
무엇보다 남편과 어린 딸, 머리카락마저 다 잃고 쓸쓸히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에 슬퍼져 눈물이 차오르는 것에 놀랐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시각화된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200자가 채 안 되는 글자로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눈앞에 생생히 펼쳐 보여준다는 게,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주인공의 앞으로의 삶마저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시라는 건 도대체 어떤 힘이 숨겨져 있기에 이토록 상상하고 떠올리고 공감하게 하는 것일까?
힘든 삶을 사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았는지 그 이후부터는 종종 백석의 시를 읽곤 했다.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가 쓸쓸함, 서러움, 상실과 같은 슬픔이지만, 읽다 보면 마냥 슬프다기보다는 그래도 다른 내일을 살아내게 하는 묘한 위안 같은 게 느껴진다.
연휴의 끝을 백석 시집으로 마무리해야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팍팍한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