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주눅 들지 않는 법
매일 아침 6시, '딸깍' 전기포트가 끓는 소리로 우리 집 하루가 시작된다. 믹스커피의 달큼한 향이 스며들고,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알람 없이도 같은 시각에 일어나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사람. 매일 완력기와 팔굽혀펴기, 물구나무서기로 하루를 닫는 사람. 60대가 되어도 나보다 체력이 좋은 사람, 우리 아버지다.
'폼생폼사', '상남자', '호랑이 삼촌'.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90년대 후반쯤, 아주 추운 겨울날 택시를 잡는데 너무 안 잡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콜택시나 스마트폰 어플도 없는 시절, 택시로 합승하며 돈을 2배로 벌던 시절이어서 인원이 많으면 잘 안 태워줬다고. 그 모습에 화가 난 아버지는 바로 다음 날 차를 샀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호기심으로라도 술담배를 절대 안 했다는 철칙 있는 사람. 5살 어린 동네 후배들이 담배 피우다 걸렸을 때는 모아놓고 뒤지게 혼냈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들이 무서워하는 선배였다고. 직장 생활 때도 아버지만의 철칙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양주를 몇 병을 마시더라도 정신을 붙들고 모든 상사를 택시 태워 보내야 취할 수 있었다고. 강단이 있고 성격이 있으며, 한 번 꽂히면 해야 직성이 풀리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와 책임감이 철저한 사람.
그런 아버지가 딸 앞에서는 조금 달랐다. 무뚝뚝하고 우직한 아버지가 많던 시절, 우리 아버지는 티 나게 딸바보였다. 형제들도, 친구들도 놀라워할 만큼.
나는 동네에 소문난 울보였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2시간은 내리 울었고, 멀미도 심했다. 그래서 항상 아빠 배 위에서 잤고, 아빠는 중앙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으며, 한 손으로 운전하며 우는 나를 달래는 스킬을 터득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술 취한 딸을 데리러 오는 기사님이 되었지만.
대여섯 살 무렵부터 나는 작은 가방을 들고 다녔다. 필통 같기도, 파우치 같기도 한 가방에는 손거울, 꼬리빗, 손수건이 있었다. 항상 뒷주머니에 손수건을 지니던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내 가방엔 손수건이 있다.
긴 생머리가 가장 예쁘다던 아버지는 중학교 두발 규정 때문에 단발로 자른 내 머리를 보며 속상해했다. 그 뒤로 나는 선생님들을 교묘하게 피해 다니며 머리를 길렀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까지 매일 아침, 내가 TV 뉴스를 보며 밥을 먹고 있으면 아빠가 뒤에서 젖은 머리를 말려줬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머리 말리는 걸 귀찮아한다. 작은 습관이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유난히 믿어줬다. 아이라고, 어리다고, 위험하다고 '못'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이게 뭐야?"라는 물음에는 "전자사전 있잖아. 직접 찾아봐"였고, "이거 어떻게 해?"에는 "직접 해봐. 할 수 있어"가 답이었다. 때로는 답답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보호였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뭐든 잘 해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그게 얼마나 큰 신뢰였는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주 6일 근무 시대, 격주로 학교를 쉬는 놀토가 있던 시절. 주말마다 우리 남매는 전국 일주를 다녔다. 너무 어려서 기억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을 가면 항상 "어? 여기 와봤는데?"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 5일도 힘들어서 주 4일제를 외치는 시대에, 하루 쉬는 주말을 자식들에게 온전히 쏟았던 아버지의 에너지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남자가 경제활동을 하고 아버지가 가장인 게 당연했던 시절, 일도 가정도 놓치지 않았던 사람.
아버지는 편지를 잘 쓰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매년 1월 1일이 되면 동네 문구점에서 산 일기장 첫 장에 아버지의 짧은 편지가 쓰여 있었다. 지금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20년 전 여름, 엄마와 오빠와 나는 한 달간 미국 여행을 떠났다. 휴가를 낼 수 없었던 아버지를 남겨두고. 처음 가본 해외에서 영어와 사투를 벌이던 우리에게, 아버지는 매일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우리는 메일을 받지 못했다. 여름철이라 음식 상할까 봐 매일 김치찌개만 해 먹으면서, 보고 싶은 자식들에게 매일 편지를 썼는데 답장 한 통 못 받았다고 꽤 오래 삐져있었다.
7년 뒤, 오빠가 훈련소에 갔을 때 그 부지런함이 재현됐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 편지를 쓰면 일주일에 한 번씩 인쇄해서 전달해 줬는데, 오빠가 제일 많은 편지를 받았다. 여자친구도 아니고 아버지한테서. 훈련소 퇴소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편지가 쌓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부지런함까지는 닮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감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몸으로 배웠다. 그 감각이 이후의 모든 비교와 격차 속에서 나를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줬다는 걸, 이제는 안다.
우리 집 가훈은 "밝고 명랑하게"였다.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 밝음은 단순히 긍정적이고 많이 웃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있어도, 어려움이 있어도 이내 내일의 햇빛을 기다릴 수 있는 단단함. 그것이 진짜 밝음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잘난 집 아이들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고, '나는 뭐든 잘해'라는 마인드로 살았다.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는 '잘해야 하는 딸'이 아니라 '이미 잘하는 딸'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세상에서 나 자신을 조금 덜 의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부터 나를 믿어줬기 때문에.
삶의 레시피는 때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 6시에 끓는 전기포트 소리, 믹스커피 향, TV 뉴스 소리. 그 평범한 아침 식탁에서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아버지가 물려준 레시피는 거창한 성공의 법칙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루틴을 지키는 일, 자식을 믿고 기다리는 일,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쓰는 일. 그런 작은 성실함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재료를 하나씩 꺼내본다.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믿음은 모든 것의 기본이 되었고, 매일 아침 머리를 말려주던 손길은 부드러운 온기를 더했다. '직접 찾아봐'라는 가르침은 향신료처럼 삶에 주체성을 불어넣었고, 주말마다 데리고 다니던 경험들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쓴 편지는 소금처럼, 적당한 간을 맞춰주는 감성이 되었다.
이 재료들로 나는 '세상에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레시피를 완성한다. 어떤 사람은 센불로 빠르게 요리를 완성하고, 어떤 사람은 약한 불로 오래 끓인다. 아버지의 방식은 후자다. 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타지 않도록 지켜보며, 제시간이 되면 알아서 익을 거라 믿는 것.
그 레시피 덕분에 나는 비교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느려도, 남들보다 덜 가져도, '나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라는 감각. 그것이 아버지가 매일 아침 식탁에서 내게 익혀준 맛이었다.
생각의 식탁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아침 밥상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던 그 자리, 매일 같은 루틴으로 채워지던 그 시간.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단단함을 조금씩 익혀낸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아버지의 자식이자, 자랑이자, 작품이자, 삶이 되었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https://m.newyorkilbo.com/4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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