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라는 향신료

상대평가에 길들여진 시대의 식탁

by Roselle

비교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있을 때 더 또렷해진다. 특히 식탁 위에서는 더 그렇다. 누군가는 연봉 이야기를 꺼내고, 누군가는 이직을 고민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전한다. 그 말들 사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계산한다.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서 어디쯤일까.


비교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둘째는 첫째와 비교되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비교하고, 키는 얼마나 자랐는지 비교한다. 성장하면서 비교는 점점 숫자가 된다. 절대적 성취가 아니라 상대적 서열이 중요해진 사회. 1점 차이로 나뉜 등급은 실력보다 서열을 먼저 말하고, 그 작은 간격이 인생의 선택지를 크게 갈라놓는다.

이 구조는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된다. 기업의 상대평가 인사 시스템, 승진의 제한,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 우리는 비교를 통해 살아남도록 훈련받아 왔고, 그 훈련은 이제 내면화되어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문제는 이 비교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학에 합격해도 학벌 서열이 있고, 취업에 성공해도 연봉 격차가 있으며, 결혼을 해도 배우자의 스펙이 비교된다. 비교는 이기거나 지는 게임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판이 깔리는 경기다.


MZ세대의 중간쯤에 서 있는 나는, 청소년기부터 SNS와 함께 자랐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창구가 이 비교를 가속화시킨다. 과거에는 비교 대상이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로 제한됐다면, 이제는 전 세계의 ‘성공 사례’가 피드에 올라온다. 명품템 자랑, 해외여행 인증샷, 육아와 커리어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내는 워킹맘의 하루.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기준’처럼 제시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상향 비교’라고 부른다. 더 나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동기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겪게 된다. 특히 SNS에서의 비교는 공정하지 않다. 우리는 하이라이트와 일상을 같은 선상에 올려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교는 멈추지 않는다. 기준이 사라진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불안을 달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교는 불안을 더 키운다.


20대를 바쁘게 살았다. 쉴 틈 없이 뭔가를 채우고, 경험을 모으고, 사람을 만나고,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때의 나는 비교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교할 수 있는 자리에 일부러 나를 세워두기도 했다. 그러나 비교에서 이긴다고 편해지지는 않았다. 오늘의 기준은 금세 내일의 부담이 되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친구 어머니가 모임에서 아직도 내 소식을 물어온다는 이야기였다. 연락이 끊긴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처음엔 단순히 어린 시절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대학원을 다닌다더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그 반응에 담겨있었다. 궁금했던 게 아니라, 아직도 ‘비교 대상’으로 인식하는구나.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도 어린 시절의 경쟁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교가 평생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도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교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질문을 바꿔보았다. “나는 남들보다 어디쯤일까?”가 아니라, “나는 이 삶을 계속 선택할 수 있을까”로. 남의 속도가 아니라 내 숨의 길이를 보는 것. 이 삶이 나를 숨차게 만드는지, 버틸 만하게 만드는지.

질문을 바꾸니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도 조금 달라졌다. 누가 얼마나 벌었는지보다,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누군가의 “요즘 뭐해?”라는 물음에 “그냥 좀 쉬고 있어”라고 답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됐다. 누군가는 연봉을 깎고 워라밸을 찾아 옮기기도 하고, 누구는 가족 때문에 인생의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도시를 떠나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쉬어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유로, 다른 속도를 살아가고 있다.

비교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참고서처럼 쓰기 시작했다. 요리를 할 때 나는 레시피북을 그대로 따라서 계량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레시피들을 힐끔 보면서 내가 가진 재료로 맛을 내려고 참고만 한다. 비교도 그렇게 쓰기로 한다. 남의 삶에 빠지지 않고, 힐끔 보고 덮는다. 대신 나의 시간을 비교해 본다. 1년 전의 나와 5년 전의 상황과 10년 전의 모습을 지금의 나와 나란히 놓아본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그 성장이 남들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내게는 의미 있는 변화였는가.

그리고 때로는 인정한다. 모든 삶의 조건이 다르고, 출발선이 다르고, 목표조차 다르다는 것을. 같은 자로 잴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재려하면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비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나는 이제 그 비교를 오래 붙잡고 있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나를 너무 싫어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이 선택이, 언젠가 나를 원망하게 하지는 않을지. 그 질문 앞에서는 남의 삶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너무 잔인해지지 않는 일이다. 비교는 사람을 채찍질하지만, 삶은 채찍만으로는 오래 갈 수 없다.

생각의 식탁 위에는 늘 두 가지가 함께 올라온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 우리는 그것을 나란히 놓고 보지만, 같은 방법으로 요리할 수는 없다. 재료도 다르고, 불의 세기도 다르면 같은 맛을 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남의 식탁을 보며 내 요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재료로 어떤 맛을 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비교는 때로 필요한 향신료다. 전혀 없으면 밋밋해질 수 있고, 아주 조금은 방향을 잡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조금’을 가늠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향신료에 익숙해지고, 누군가는 평생 덜어내지 못한 채 본래의 맛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비교를 ‘간 보기’처럼 쓰기로 한다. 국을 끓일 때 중간중간 맛을 보듯, 비교를 잠깐 들여다보고는 다시 내 냄비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간을 맞출 필요가 없듯, 삶의 간도 중간중간 맞춰주면 된다. 우리의 삶은 즉석요리가 아니다. 어떤 맛은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만들어진다.


중요한 건, 내가 만드는 음식이 나를 만족시키는가.
내가 만드는 이 삶이, 나를 조금이라도 덜 소진시키는가.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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