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OJ, 나를 만드는 것들 - 9
마케터라는 직업을 갖고 나서
나는 자연스럽게 브랜드들의 이벤트와 전시에 눈이 간다.
뉴욕에 여행을 갔을 때,
MoMA 입장을 위해 현대카드를 발급받았다.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현대카드라는 브랜드가 이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획하는지를 체감할 기회였다.
그리고 최근 톰 삭스(Tom Sachs) 전시를 다녀왔다.
현대카드 이벤트로 무료 관람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은 단순한 전시 이상의 의미로 남았다.
현대카드는 나에게 계속 문화를 제공해주고 있다.
Thank you, Hyundai Card.
톰 삭스 전시가 열리는 DDP 안,
나는 작은 상자 하나 앞에 섰다.
겉은 투박했다. 골판지, 테이프, 조립의 흔적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안은 달랐다.
거울이 반사되고 또 반사되며,
50mm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그 장면을 포착했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로 투사되어 장면을 관람객에게 비쳤다.
50mm 화각은 인간의 시선과 가장 가까운 화각이다.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왜곡 없이 닮아내는 카메라의 눈.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었다.
가장 인간적인 화각을 흉내 낸 기계적 눈을 거쳐
설계된 이미지를 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 화면 속 표면은 매끈하지 않았다.
현미경으로 본 원석 같기도, 우주의 돌 표면을 캐낸 듯한 질감 같기도 했다.
나는 작품을 본 것이 아니라, 시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 당하고 있었다.
내 의지라기보다, 장치가 설계한 시선 위로 끌려 들어간 감각이었다.
옆에는 또 다른 전시들이 있었다.
라이카 로고가 붙어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소니 카메라였다.
브랜드의 권위를 스티커 하나로 희화화한 장난.
NASA 로고가 새겨진 카메라도 있었다.
아폴로 시대 우주비행사가 썼던 핫셀블라드.
그러나 삭스는 그것을 나무와 나사로 조립해냈다.
완벽한 재현이 아닌, 불완전한 모조품.
이것이 바로 브리콜라주였다.
주변의 잡동사니를 모아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방식.
삭스는 이 방식을 통해 권위를 비틀고,
우리가 숭배하는 기술과 브랜드조차
다시 조립 가능한 산물임을 드러냈다.
그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선도, 브랜드도 결국 설계되고 길들여진다는 사실을.
웹사이트에서 우리의 눈은 자유로운 듯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흐른다.
광고와 구매 CTA 버튼이 그 자리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지하철 노선도, 백화점 동선,
심지어 대화 중 상대의 손짓까지.
눈길은 늘 사회와 장치가 짠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브랜드는 그 경로를 차지하려 싸운다.
에너지드링크 회사 레드불이 굳이 F1 팀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엔진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계 화면과 피트월, 드라이버의 헬멧.
시선이 모이는 모든 순간을 독점하기 위함이었다.
소니는 워크맨으로 귀를 점령한 뒤,
카메라 뷰파인더로 ‘보는 법’까지 가르쳤다.
자동차 계기판과 HUD 역시 마찬가지다.
운전자의 눈길을 어디에 둘 것인가.
브랜드 철학은 결국 시선 배치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사진을 배우고 난 뒤로
나는 거리를 다르게 본다.
프레임 속 요소들을 정렬하고,
시선이 흘러갈 길을 미리 그린다.
운전할 때도 도로는 하나의 거대한 프레임이다.
간판과 신호등, 창밖 풍경은
리듬처럼 시선을 옮기게 만든다.
HUD가 겹쳐질 때, 시선은 다시 교정된다.
독자도 경험했을 것이다.
간판의 화살표를 따라간 적,
백화점 동선이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느낀 적,
웹사이트에서 무심코 광고 버튼을 누른 적.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길들여진 시선 위에서
세계와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설명을 다 해주는 브랜드는 빠른 전환을 만든다.
그러나 여백을 남기는 브랜드는
상상을 오래 붙잡는다.
애플의 광고가 그렇다.
기능을 나열하기보다
하나의 장면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마케터에게 필요한 것도 같은 균형이다.
효율과 잔향, 속도와 기억 사이에서
어떤 시선을 설계할 것인가.
시선을 잡는다는 건
클릭을 유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을 어디에 남길지를 정하는 일이다.
톰 삭스의 장난스러운 장치들 앞에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본 건 작품이 아니라,
시선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였다.
그리고 마케터의 시선도 다르지 않다.
광고 문구, 배너 위치, 매장 동선, 소비자의 반응.
우리는 수없이 길들여지고,
동시에 또 관찰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이미 설계된 길 위에 있다면,
마케터의 시선은 어디에 오래 머물러야 할까.
그 선택이야말로 브랜드 전략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마케터 자신을 길들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