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가 듣는 도시의 목소리

ENOJ, 나를 만드는 것들 - 6

by 엔오제 ENOJ

#6 마케터가 듣는 도시의 목소리

나는 간판을 먼저 본다고 했다.

간판은 도시의 문장이었고, 그 문장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문장을 읽는다는 건 곧 얼굴을 보는 일이다.

내가 마주한 얼굴은 누구일까.

내 귀를 흔드는 목소리는 또 누구의 것일까.


도시를 걷다 보면 눈보다 먼저 귀가 반응한다.

간판의 빛은 시선을 잡지만, 오래 남는 건 소리다.

경적, 지하철 멘트, 거리의 음악, 택시 라디오.

뒤섞인 소리들은 묘하게 도시의 얼굴을 완성한다.


마케터에게 도시는 배경이 아니다.

눈으로 읽는 간판이 문장이라면, 귀로 듣는 소리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이해하는 순간, 브랜드가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


브랜드가 목소리로 말하는 법


“두둥.”

넷플릭스의 짧은 두 박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공유하는 청각적 문장이다.

화면이 켜지기도 전에 감각은 긴장과 설렘으로 물든다.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신호. 이것이 넷플릭스가 목소리로 말하는 방식이다.


“빠라 빠빠빠~.”

맥도날드의 ‘I’m lovin’ it’은 단순한 로고송을 넘어,

수십억 명의 기억 속에 각인된 생활 리듬이다.

메뉴를 보지 않아도, 매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소리는 이미 뱃속을 자극한다.


“즐거움엔 끝이 없다, tvN.”

국내 방송 채널 tvN의 시그니처 역시 프로그램 시작 직전,

짧은 소리만으로도 시청자를 몰입시킨다.

즐거움은 곧 목소리로 증명된다.


브랜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각적 로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은 시각보다 청각을 더 오래 기억한다.

청각은 직접적이고, 반복적이며,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마케터는 이 장치를 ‘징글(Jingle)’이라 부른다.


도시는 '말'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징글은 무엇일까?


Seoul

DSCF1470.jpg 서울의 상징역 중 하나인 서울역

“따다다라란, 따다라라란, 따라라라라란, 따란 따라랑~.”

서울 지하철 2호선의 특유의 신호음은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다.

매일 수백만 명이 듣는 이 소리는, 세대를 넘어 공유되는 서울의 징글이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고, 시간을 계산하며, 하루를 움직인다.

서울은 마치 거대한 합창단 같다.

개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모두가 같은 리듬에 맞춰 흘러간다.

이 반복적이고 무의식적인 패턴 속에서, ‘규율과 속도’라는 서울의 성격이 드러난다.


London

20180526-_MG_2609.jpg 런던의 튜브 안

“Mind the gap.”

런던 지하철의 단순한 안내 문구는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관광객은 기념품으로 사 가고, 현지인은 매일 듣는다.

그러나 단순한 안전 문구를 넘어서, 이 말은 런던이라는 도시의 성격을 대변한다.


친절하게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단호하게 경고한다.

세 단어로 압축된 목소리는 ‘질서와 규칙’을 일깨운다.

브랜드 메시지가 불필요한 수식 없이, 단단한 핵심으로 다가올 때 힘을 가지듯 말이다.


New York City

DSC06980.jpg 뉴욕 MTA

“Stand clear of the closing doors, please. 띵동–.”

MTA 지하철의 안내 멘트는 빠르고 무심하다.

마치 도시가 직접 명령하는 듯하다.


“늦지 마라. 방해하지 마라.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


DSC08778.jpg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바라본 맨해튼 브리지

그러나 뉴욕의 목소리는 안내 멘트에 그치지 않는다.

브루클린 브리지 옆, 맨해튼 브리지를 달릴 때 들려오는 금속의 마찰음.

귀가 멍멍해질 만큼 시끄럽고, 다리 전체가 진동하며, 대화는 삼켜진다.


하지만 바로 그 소음이 뉴욕을 말한다.

뉴욕은 배려하지 않는다. 장식도 없다.

그저 앞으로 달려가는 에너지 그 자체다.

소음마저도 자기 목소리로 흡수해버리는 도시. 그것이 뉴욕이다.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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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지하철

도쿄 지하철은 역마다 다른 멜로디가 울린다.

어떤 역은 발랄하게, 어떤 역은 서정적으로.

이 미묘한 차이가 쌓여 도시의 얼굴을 다층적으로 만든다.


도쿄의 목소리는 ‘규율 속의 변주’다.

동일한 시스템 속에서 역마다 작은 개성을 허락한다.

모든 것이 시간에 맞춰 움직이지만, 그 안에는 여백이 있고, 차이가 있고, 리듬이 있다.

브랜드가 동일한 로고 아래, 제품마다 다양한 서브컬처를 허용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도시의 얼굴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도시의 얼굴은 무엇일까?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택시다.


뉴욕의 옐로캡

DSC08000.jpg N.Y.C. TAXI

공항에서 처음 마주하는 것도, 새벽 귀가길 마지막까지 남는 것도 노란 택시다.

그러나 진짜 얼굴은 제도에 있다.

한때 뉴욕 택시는 ‘메달리온’ 제도 아래 운영되었고, 작은 금속판 하나가 수십억 원에 거래됐다.

옐로캡은 단순한 차가 아니라, 도시가 허락한 특권이자 계층 구조의 상징이었다.


런던의 블랙캡

20180524-_MG_1066.jpg London Taxi

둥근 차체와 고풍스러운 외형은 상징적 장식일 뿐이다.

진짜 도시의 얼굴은 기사에게 있다.

블랙캡 기사가 되려면 ‘더 놀리지(The Knowledge)’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3~4년간 수천 개의 도로와 랜드마크를 외워야 한다.

블랙캡은 단순한 택시가 아니라, ‘도시 지식’을 체화한 사람과 함께 달리는 얼굴이다.


타이베이의 노란 택시

DSC09670.jpg 타이베이 역 근처에 줄세워진 택시 행렬

타이베이 역 앞에는 노란 택시가 줄지어 늘어선다.

누군가에겐 '인상적인 장면'이지만, 현지인에겐 '무심한 일상'이다.

뉴욕의 옐로캡이 아이콘이라면, 타이베이의 노란 택시는 생활의 배경이다.

특별함은 없지만, 그 '평범함'이야말로 이 도시의 얼굴이다.


도쿄의 택시

DSCF3037.jpg 도쿄 시부야 거리 위 택시

시부야의 거리 위에선 다른 얼굴이 다가온다.

검은색 혹은 짙은 초록색 차체, 네모난 박스형 차가 줄지어 선다.

뒷좌석 문은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승객은 문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기사에게서 배려받는 경험이 도시의 '기본값'으로 설정된 셈이다.


택시 내부는 더 세심하다.

하얀 레이스 시트 커버, 정갈히 놓인 카드 단말기, 정장 차림의 기사.

정중하고, 때로는 의례적일 만큼 격식을 갖춘다.

그래서 일본의 택시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서비스의 얼굴’이다.


뉴욕의 옐로캡이 강렬한 첫인상이라면,

런던의 블랙캡은 지식의 얼굴,

타이베이의 노란 택시는 생활의 얼굴,

도쿄의 택시는 정중함과 질서의 얼굴이다.


새로운 얼굴 - 모빌리티 앱

그러나 오늘날 도시의 목소리는 택시를 넘어 모빌리티 앱으로 확장된다.

우버의 “Your ride is arriving.”, 카카오T의 “배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이 짧은 멘트들은 이동의 리듬을 바꿨다.


예전에는 길가에 손을 흔들어야 했던 호출이, 이제는 알림음 하나로 대체된다.

그 소리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도시의 또 다른 징글이다.

‘이동의 경험’을 설계하는 브랜드가 도시의 목소리를 차지한 셈이다.


그리고 얼굴 역시 변했다.

스마트폰 속 작은 아이콘 카카오T의 파란 배경, Uber의 검은 심볼,

이 아이콘은 이제 새로운 택시의 얼굴이다.

배차가 확정될 때의 신호음, 도착 알림의 진동 패턴은 도시의 새로운 음성이다.


물리적 택시가 도시의 얼굴이었다면,

이제는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도시는 점점 더 화면 속에서 말을 걸고, 브랜드는 그 대화를 설계한다.


마케터가 듣는 도시의 목소리는...

간판이라는 문장, 택시라는 얼굴, 징글이라는 목소리, 앱이라는 새로운 언어.

도시는 매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어떤 날은 택시 창문에 스친 네온사인이 하루를 환하게 붙잡고,

어떤 날은 지하철의 단호한 멘트가 내 마음을 재촉한다.

우리가 대답하지 않아도, 도시는 늘 우리를 흔든다.


마케터에게 이 흔들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간판처럼 직접적으로 말하는 브랜드가 있고,

택시처럼 일상의 얼굴이 되어 스며드는 브랜드가 있으며,

징글처럼 무심히 흘러도 끝내 기억에 남는 브랜드가 있다.

이제는 앱 알림음처럼, 디지털로 번역된 목소리까지 확장된다.


도시가 사람들의 삶을 언어로 새기듯,

브랜드 역시 일상 속에서 자기 목소리와 얼굴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발견하고, 전략으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케터의 일이다.


그렇다면 마케터가 듣는 도시의 목소리,

당신은 오늘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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