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우리가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두가지 이유

나에 대한 나의 기대, 그리고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자동적 사고

by 대장장이 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나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고 당연히 잘 알지 않을까. 물론 내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모든 비밀도 나만은 알고 있고, 내가 느끼는 신체적 감각이나 감정 또한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산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 것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내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담심리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나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잘 알기 위해 고민하고, 상담자가 되어 내담자를 상담해주고 내담자가 되어 상담도 받으면서 가장 절절하게 느낀 것 중 하나는,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구나.' 였다. 나는 내가 누구보다 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소위 '쫄거나 깨갱하지' 않는 "상남자"라 생각하며 근 30년을 살았다. 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겁이 많고 쉽게 위축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언제나 평온하고 의연하지는 못하더라도 꽤나 내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일정 수준에서는 내 정서와 마음상태를 잘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굉장히 감정기복이 심하고 스스로의 마음과 감정을 통제하기는커녕 내가 가진 감정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모든 이들에게 한없이 좋고 사려깊지는 못하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배려있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내 안에 있는 가시와 열등감과 상처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참 많이 상처주고 할퀴고,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 뭐, 의식의 흐름대로 계속 쓰다간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내년 초겨울 즈음에나 끝맺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당신이 얼마나 항상 올바르고 안정감 있고 따뜻하고 능력 있고 멋진 사람이든, 당신 스스로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것은 없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일은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누군가가 스스로에 대해 온전히 다 아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믿는다. 한 때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는 무언가 깨달음이나 내면의 평화를 얻고 그동안의 과오나 욕심을 내려놓으며 편안하게 삶을 반납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책과 자료들을 통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상당히 불편하고 가슴이 짓눌리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는 호스피스나 몇몇 직군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특히 대중성보다 진실을 까발리는 뉘앙스의 책이나 영상들)을 보면, 의외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후회와 채워지지 않은 욕심에 대한 아쉬움, 분노 따위를 평온함보다 훨씬 더 크게 마음에 담아둔 채 삶을 마치기도 한다.


이 무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상황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한 채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좀 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낼 껄, 일에 덜 매달릴 껄, 남들의 기대와 요구에 대해 눈치를 덜 볼 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과감하게 시도해볼 껄 등등. 지금 이렇게 나열하는 이야기들은 오늘 저녁에 당장 서점에 가서 사람들의 임종 직전 순간을 인터뷰한 여러 책 중 하나를 펼치면 반드시 한 가지 이상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그 책이 쓰여진 시대나 문화, 국가를 불문하고 꽤나 유사하다. 물론 이 후회와 아쉬움들이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사람이 임종 직전에는 정말 솔직하게 진심을 말하지 않겠냐는 암묵적인 가설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이 가설을 엄청 강하게 믿지는 않는 편이기도 하거니와(죽는 순간까지도 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을 직시하지 않을 이유는 우리동네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 만큼이나 많다고 생각한다.), 정작 내게는 다른 어떤 한 가지 생각이 훨씬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던 것 같다. 그 점은 바로 아까 이야기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짐작이다. 이런 여러 간접적인 경험들과 상담심리학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리 스스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행복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열쇠인 '현존'과 '몰입'을 할 수 없게 된다.(https://brunch.co.kr/@realrestkjh/12 참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채울 수 있게 해주고 이를 통해 죽음 앞에서 덜 후회하며 삶을 반납할 수 있게 하는 열쇠인 '현존'과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순간순간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아주 오랜 시간과 아주 많은 지면에 걸쳐 이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해나갈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상담가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상담관계를 제공해줄 수 있기를, 스스로를 상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기상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게 있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왜 잘 이해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주제인 '자기상담가 되기'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만큼 절대 짧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포스팅에서는 일.단.은. 아주 짧고 간략하게, 가장 공통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큰 그림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라고 믿는 '나'와 실제의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대상으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총체를 '자기개념'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우리가 우리라고 믿는 '나'이다. 우리가 '나'라고 지각하는 모든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구성된 스스로에 대한 일관성 있는 모습을 '자기개념'이라고 한다. 이 '자기개념'과 '실제 나 자신'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자기개념과 일치하는 경험과 생각, 감정, 행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자각하지만, 자기개념과 배치되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 행동, 경험에 대해서는 아예 자각을 하지 못하고 부인하거나 왜곡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가령, 누군가가 본인 스스로를 '절대 유치하게 질투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이 정말 유치하고 사소한 일에 질투를 느낄 때 이러한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은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평생 살아온 사람이라면,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극심하게 분노를 느끼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마음에 화가 일어나더라도 이를 자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자기개념'과 '실제의 나'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되고, 이게 심해지면 결국 신체적 증상이나 다른 정신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기까지도 한다. 이러한 '자기개념과 실제 나 사이의 괴리'는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이론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고, 사실 정신분석이나 대상관계이론, 인지행동치료, ACT 등 다른 주요 상담이론들 또한 이 주제를 (용어만 다를 뿐) 매우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칼로저스는 자신의 저서 Client-centered Therapy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삶에서 경험을 할 때, 그 경험은 지각되거나 지각되지 못한다. 지각되지 못하는 것은 나와 무관하기 때문이거나, 자기구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각되는 경험은 자기와 관련 있는 어떤 것으로 제대로 지각되거나, 자기구조와 일치하지 않아서 왜곡되어 상징화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 신체반응 등의 기저에 깔려있는 자동적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감정을 느낄 때 그 행동이나 감정, 신체반응 등을 유발하는 우리의 주관적인 사고과정이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식역하 사고'라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보충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식역'이라는 것은 감각이나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의 크기를 말한다. 이를 보통 '절대적 식역(Absolute Threshold)'이라고 하는데, 이해를 위해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주 미세한 단위로 음량을 높이고 줄일 수 있는 스피커가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그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음량이 0.1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0.1이 바로 절대적 식역, 즉 우리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최소의 자극의 크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볼륨이 0.09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이 문제가 된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분명 의식 상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의 작은 자극(소리)이지만, 무의식 중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크기의 자극이 있는데, 이렇게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의 자극을 무의식이 지각하는 것을 '식역하 지각(Subliminal Perception)'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무의식 상에서만 인식되는 자극을 이용한 식역하 광고나 식역하 브랜딩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앞서 이야기한 자동적 사고는 우리가 의식상에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서 자동적으로는 일어남으로써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자동적 사고는 일종의 '식역하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자동적 사고는 우리 일상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인지행동치료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주제이고,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적 접근이나 인간중심상담 등에서도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이다. 톨레가 자신의 저서 'The power of now'에서 말한 내용을 한 번 음미해보자.


생각이라는 것은 일종의 질병이다. 올바르게 사용하면 마음은 아주 훌륭한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마음이 우리를 부리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마음을 부리지 못하고 부림을 당하는 것이 곧 병이다. 도구가 주인의 자리를 점령하고 만 꼴이다.


수많은 이유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중 가장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이유 두 가지를 꼽아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형태의 방해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허허..


P.S) 내 결론은 사실 이미 정해져있고, 그 결론이란 매거진 제목과 여러 글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자기상담'이다. 언젠가 이야기할 일이 있겠지만, 나는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상담가와의 상담이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삶을 행복하게 누리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다만, 자기상담가 되기 프로젝트 매거진을 만든 이유는, 상담을 받기가 쉽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담소를 찾게 하는 하나의 이유보다 발걸음을 꺼리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에 이르러서까지도 상담받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두서없는 이 글들은 결국에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상담가가 되어주는 자기상담가 되기로 귀결될 것임을 또 한 번 밝혀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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