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이 범인이다, 우리는 그 녀석을 붙잡아야 한다
무언가 묘하게 지리멸렬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살짝 가라앉은 느낌이 들거나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이 때 우리의 감정을 캐치해야 한다. 휘몰아치는 분노와 끝을 알 수 없는 우울, 좌절감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이 내 삶과 영혼을 휘두르고 지배하기 전에, 조금씩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오는듯한 느낌이 들 때, 그 때 그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미리 그 감정이 커지기 전에 우리가 통제해나갈 수도 있고, 우리 마음의 근원에 깔린 뿌리와 같은 지위를 가지는 감정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가장 깊숙이 깔린 감정들은 대개, 희미하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 당신의 가슴 한 켠에 묘하게 회색빛이 감돌거나 무언가 모르게 묘한 느낌으로 불편한지 아닌지 아리까리할 정도의 '희미한' 어떤 느낌이 있다면, 나는 당신이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가장 첫단추는, (내가 언제나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그냥 그 감정을 아무 생각 말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은연 중에 자꾸 안 좋은 감정을 인지해서 얼른 제대로 처리하거나 사라지게 하거나 하고 싶어한다. 즉, 자꾸 무언가를 하고 싶어한다. 근데 음... 무얼 하려고 하지 마라. 무얼 하려고 의도를 가지고 다가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자식을 어떻게든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으로 돌려보겠노라 마음 먹고 말을 거는 부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고 진심이 담긴 소통을 하려는 자식은 이 세상에 없다. 한 번 잘 해보려는 마음을 잔뜩 가지고 이성에게 다가갈 때, 당신은 그 이상 어색하고 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힘들다.(뭐, 얼굴이나 재산으로 충분히 매력어필 가능하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가진 매력을 팍팍 깎아먹는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제발,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고자 하는 일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접근해주길 바란다. 뭘 자꾸 이 우울함을 어떻게 떨쳐보겠다느니, 이 분노를 승화시켜보겠다느니 하지 마라. 우울해 죽겠는데 뭘 떨칠 것이며, 화가 나 미치겠는데 뭘 승화하고 용서한단 말인가. 아, 물론 여기서 내가 주제로 삼는 감정은 그런 강렬한 감정이 아닌 오묘하고 희미한 수준으로 우리 마음을 감도는 감정이지만, 무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거다. 그냥, 지금 이 옅은 안개처럼 내 마음 속을 뿌옇게 만드는듯한 이 느낌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것인지 그 안개를 따라 그냥 걸어라. 그 자욱한 안개를 따라 계속 걷다보면, 무언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냥, 아 안개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 그냥 그러고 말아라. 안개가 시작된 곳만 알면, 그 안개가 걷히는 곳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신이 그 옅은 안개, 묘하게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그 감정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간다면, 어느샌가 점차 명료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오랜 시간과 오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체감할만큼 선명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외로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1시간, 아니 30분 정도만 살펴보다가도 무언가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의외로 우리 스스로를 잘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의외로 빠르게 통찰한다. 그러면, 그것을 꼭 글로 종이에 써라. 메모어플에 메모해도 좋다. 반드시 써라. 이 어렴풋한 감정의 실마리는 어떤 이유에선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항상 외면하고, 은연 중에 느끼면서도 어딘가에 덮어두던 것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또 습관처럼, 지금 실마리를 잠깐 지각했더라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느새 금방 여지껏 그랬던대로 다시 어딘가에 묻어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그 묘하게 손에 잡히지 않을듯한 감정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들은 무시못할 축적물이자 우리의 역사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금방 뿌연 안개 속으로 그 실마리를 던져버리고 그게 무엇이었는지 까먹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써라. 아무 종이에나 써도 좋다. 가급적 자세히, 상세히 써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 감정을 자꾸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가득 찬 채로 이 과정들을 수행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그건 꽤나 시간이 많이 흐른 추후의 일이다. 지금은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고, 그냥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데 모든 정신과 마음을 집중해라.
그렇게 한 번 글로 쓸 수 있게 된 후에는, 그 감정은 더이상 우리에게 희미하게 안개처럼 우리를 있는듯 없는듯 맴도는 감정이 아니게 된다. 운동을 할 때도 근신경이 발달하고 나서 특정 근육의 자극을 명료하게 느낀 후에는 계속 그 자극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게되듯이, 마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빛을 비추고 난 곳에서 다시 자라나는 비슷한 감정은 더이상 어둠에 묻힌 안개가 아니라, 선명하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존재를 지각할 수 있는 감정이 된다. 여기까지만 온다면 그 후는 나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수월할 수도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이 있는 곳에 자아가 있게 하라.'라는 말이 유명한데, 이 말의 뜻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 빛을 비춰서 자아가 의식하게 하라는 의미다. 그 후 훈습이라는 일종의 '훈련과정'이 있긴 하지만,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은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자각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게 가장 핵심이자 본질적인 과정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당신이 뿌옇던 그 안개같은 감정을 선명하게 이해하는 일 자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는 성취이자 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제대로 자각하는 것만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금이 딱 좋다. 나중 말고 지금이 좋겠다. 이 글은 이제 끝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밝지 않고 묘하게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 있다면, 그 안개를 따라 길을 걸어보길 추천한다. 좋은 성취가 있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