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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

안 되는 건, 안 되는거다. 포기도 안 좋지만, 집착은 우리를 질식시킨다

by 대장장이 휴

내 시간과 땀과 염원과 노력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사흘 내내 하루에 한끼만 먹고 내사랑 치느님도 안 먹었는데 체중이 하나도 안 빠졌을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일주일 내내 4시간만 자고 공부했는데 시험성적이 40점이 채 안될 때, 우리는 울적해진다.


우리가 노력한 결과가 전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반적인 상황일까, 아니면 예외적인 상황일까. 아마 통상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일 것이다. 게임, 투자, 공부, 운동, 다이어트, 사업, 일, 인간관계, 그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다. 우리가 노력했다고 해서 노력한 결과가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한다. 왜 내가 열심히 노력했는데 노력한만큼의 결과가 안 나타나는거지? 왜 쟤는 나랑 비슷하게 노력했는데, 아니 나보다도 덜 노력한 거 같은데 운이 좋은 바람에 결과를 얻고 난 못얻은거지?


여기에는 아주 위험한 세 가지 오해가 연루되어 있는 것 같다.


하나. 인생은 확률게임에 가깝다. 즉, 내가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특정 결과가 반드시(라고 쓰고 '언젠가는'이라고 읽는다.) 나와야 한다는 것은 '무지성 뇌피셜'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맹랑한 망상이라는 이야기다.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헷갈리는데, 수학시간에 충분조건이라는 걸 배운다. A면 B다. 라는 명제에서 A는 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다. A를 충족하면 B를 현출하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과연 인생에 저런게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B가 우리 삶에 일어나기 위해 충분한 조건, 100% 조건인 A같은 건 없다. 영화 '나비효과'를 혹시 아직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심심할 때 봐보길 추천한다. 어떤 결과 B가 세상에 현출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말 그대로 수만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B가 우리 삶에 일어날 확률을 높이는 정도다.


둘.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바라는 B를 우리 삶에 일어나게 해줄 충분조건 A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A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기껏해야 B의 다른 표현에 가깝거나, 지극히 피상적으로 B에 다다르기 직전인 몇단계의 조건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서는 그걸 A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B'이지 A가 아니다.


셋. 설령,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우리에게 B를 우리 삶에 가져다줄 충분조건 A가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고 완전하게 알려줬다고 하자. 백번 양보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조건들이 우리가 통제가능한 범위 내에만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우리가 신의 가호를 받아 A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더라도, 어차피 A를 우리 힘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오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허상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매순간 의연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영영 못될 거 같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순간 나를 좀 더 자유롭게 해준다. 좀 더 내려놓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나와야한다는 생각조차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 결과가 나오는 시기조차 버거킹처럼 즉각적이야 한다는 기대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만족보다는 실망과 좌절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말자. 당장 눈앞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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