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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Feb 14. 2023

어떤 권태가 나에게 물었다

소박하고 초라한 그 우울에 관하여


그 날 역시 매우 평범한 하루 중 하나였다. 

충무로역 근처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마치고

그날 따라 명동까지 한 정거장을 걷고 싶었다.


40대가 되니 운동은 싫고 걷는건 좋아진다.

나름 운동이 될까해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본다.


오늘은 무언가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로 걸어가 본다.

오롯히 나만의 시간, 나만의 일탈, 나만의 권태를 확인하는 시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자기를 갈아 넣었지만

가냘프게 허무속으로 산화되어버린 전혜린.

1950년대 서울대에 들어가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부잣집 자녀.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20대에 서울대 교수가 된 천재 여인.

그녀는 뭐가 부족해서 서른 한살에 자살을 했을까.


난 늘 그게 궁금했다.

어쩌면 40대가 될때까지 나름 열심히 살아왔고

운영하는 회사도 있고 지인도 많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끔 무한히 침전하는 권태와 우울에 허우적대는

나의 모습과 어느정도 닮아 있다고 느낀걸까.


사실 며칠전부터 이 곳을 오고 싶었다.

서울 중구 남학동 25번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곳이다. 

그 누구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그 곳에 

나라는 사람이 간들 무슨 의미가 있으련만.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지도 앱을 보며 찾아간 고가도로 앞 작은 공원.

전혜린이 살던 주택은 다 허물어진지 오래다.

아마 이쯤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음을 결심한 곳.

그녀의 권태의 본질. 우울의 중심에 나도 서 있다.


5미터도 안되는 작은 공원에는 그녀의 작은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흔한 푯말조차도 없다.

금연구역이라는 푯말하나가 꽃혀있지만, 비흡연자인

나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를 위한 무명 남자의 연민 혹은 초라한 낭만적 유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겨울 빠르게 지나가는 고가도로 앞 무심한 도심의 풍경은

세월이 덧 없음을 죽음이 덧 없음을 존재가 덧 없음을

너무나도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미팅이 끝나고 관계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냥 약속이 있다며 나왔다. 난 이 곳에 와보고 싶었다.

사실 미팅하는 내내 이 곳이 궁금해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와본 이 곳에는 무심과 허무의 공기만이 

더욱 가득했다.


공원 바로 앞에 소망분식이라는 가게가 하나 보였다.

점심이 다 되어가지만 단 한 명도 찾지 않는 분식점.

슬레이트 지붕에 어설프게 씌여진 분식 메뉴들.

들어갈까 말까 발길을 돌리길 세 번.

용기내서 들어가 보았다.


메뉴는 단촐한 라면 몇개와 떡뽂이

그 흔한 블로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런 의미 없는 분식집.

자리는 다해봤자 5명이나 앉을만큼 비좁았다.

들어가도 그 흔한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냥 다시 나갈까 하다가

두꺼운 패팅을 벗어 옆 의자에 걸고 아주머니를 불러보았다.

옆에 방틈 사이로 주무시다 인기척에 삐죽 나온 아주머니가

살며시 등유 난로를 앞에다 무심히 가져다 주신다.

어릴 때 맡았던 그 특유의 기름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찌른다.

그 향이 기분 나쁘기 보다 오래전 어린시절의 가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싫지 않았다.


뻔하디 뻔한 분식 메뉴를 한동안 훑어보았지만

매일 먹는 것에 미쳐서 오마카세와 고급음식에

길들여져 있던 혀는 갈 길을 잃은지 오래다.


그나마 구미가 당기는 짜파게티를 주문했다.

단돈 3500원. 그래 뭐라도 먹자.

12시가 훌쩍 지난 시간인데 그 흔한 직장인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머니가 무심한 듯 구석에서 라면을 끓인다.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가 먼저 놓인다.

손데고 싶지 않아 따뜻한 보리차에

몸을 녹여 본다.


생각해보니 나는 배가 고픈게 아니었다.

난 그냥 이런 광경을 원했던 것이다.

그냥 소박하고 조촐한 비좁은 공간에 

사로잡힌 초라한 풍경.

난 그걸 즐기는게 확실하다.

난 정상이 아닌가보다. 살짝 미친거 같기도 하다.

허나 이런 행동이 나에겐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알 것만 같다.


라면이 나왔다.

기대는 안했지만 국물이 한 사발이었다.

그 흔한 짜장라면도 모르는 요리실력이다.

평소 같으면 바로 종업원을 불러 한 마디 했을텐데

오늘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이 물짜장마저 이 모든 풍경과 제대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했던 그림이다.

3500원에 그저 그림을 완성시켰을 뿐이다.


정말 맛 없게 후루룩 설익은 면만 건져서 

먹고 자리를 일어선다.

카드는 아닌거 같아서 만원짜리를

건냈다. 환하게 웃으며 거스름돈을

주신다. 사실 만원을 다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받아야겠다.


잘 안 열리는 차가운 섀시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화려한 중구의 고층 빌딩들이 보이고

나는 가장 초라한 슬럼가에 서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입에서 김이 올라온다.

안경은 습기로 가득차고, 세상이 잠시 뿌였게 보인다.


문득

셀로판지 안경을 만들어

가끔은 어둡게 가끔은 노랗게 

내 기분을 바꾸어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전혜린이 마지막까지 숨을 쉬었던

그 공원 앞을 다시 지나간다.


그녀도 이 맛없는 분식을 먹었을까.

그리고 뭐가 그리 권태로웠을까.

그리고 나는 뭐가 그리 권태로울까.


오늘도 아무 답도 찾지 못한채로

허무의 공간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복잡한 명동길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

어떤 의미가 없더라도

혹은 어떤 의미를 만들어서라도.


겨울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바닥을 침전하는 이 우울의 

그 끝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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