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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Feb 14. 2023

소요유(逍遙遊); 평생 단 한 번도 가난하지 않은 남자

소유의 허무에 대하여


오늘은 겨울비가 내린다. 나이가 들수록 비가 내리는 날이 참 좋다.

맑은 날의 설레임보다 비오는 날의 갇힌 느낌이 좋다. 


약속이나 한 듯 서재에 은은한 누런색 조명을 키고

올드 재즈 한 곡을 틀면 그 곳이 최고의 동굴이 되고 최고의 글 명당이 된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의 심연에 잠복하고 있던 글 배설 욕구가 다시 손가락까지 타고 올라온다.  


요즘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시계제로의 날들이다. 관심을 가질수록 더욱 사람을 굴욕적으로 만드는

시간들이다. 시장은 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굴욕을 느끼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말이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요즘은 수년 만에 시장에서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라이프를 살고 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나이가 40이 넘으며 생긴 감성적인 생리불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으른 고독과 나태한 권태의 시간은 삶의 본질을 보는 내공을 길러준다.

이 시간마저 인생에는 꽤 영양가가 있는 시간인 것이다. 


초조함을 버리고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본다. 그리고 내 자신의 마음을 훑어 본다.

바쁘게 돌아가는 뇌의 속도를 늦추고, 투자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실존에 대해

명상한다. 그래야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대로 살수 있다. 


요즘 경기침체로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모든 자산이 역대급으로 폭락하며 힘들어 하는 지인들을 많이 본다.

어떤 위로를 해도 여유로워 보이는 타인의 위로는 의미가 없는 찰나의 합리화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술 한잔에 어깨를 두드려 주는게 다 일것이다. 


그리고 난 사실 그 말에 크게 동감하지 못한다. 아니 동감 안한다. 

난 평생 단 한 번도 가난하다고 느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 많은걸 자랑하는 것이냐. 금수저 출신일 것이 분명하다.

허나 다 틀렸다. 

나는 충청도에 인구 3만명도 안되는 깡촌에서 태어났고 할머니 손에 자란 농부의 아들이었다.

다행히 나름 시골에서 자랐지만 밥 굶으며 살지 않을 정도는 됐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집안도 능력있는 아버지도 두지 못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식당을 전전하며 돈을 버셨고, 아버지는 페인트 칠을

하며 아들 둘 키우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런면에서 결핍의 중심에서 집안을 위해 자기를 갈아넣어

자식을 교육하고 지금도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을 존경한다.

비록 풍족하지 못했고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가난할만도 했던

시절에 내가 단 한 번도 가난을 느끼지 않게 살게 해준 것에 감사하다.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이 고급 일제 카세트를 자랑하고

브랜드 옷을 입어도 난 한 번도 그걸 부러워 해본적이 

없다. 무언가를 그렇게 원하거나 가져보고 싶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난 늘 그게 궁금했다.

나는 왜 무언가를 가지고 싶지 않은가.

나는 물욕이 없는 걸까. 시크한 걸까. 


평소에는 작은 것에 강박적으로 아끼는 습관이 많다.

술집에서 소주를 먹다 남으면 굳이 그걸 집에 가져온다.

난 홈플러스나 이마트에 가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한다.

개똥을 치울때도 깨름찍하지만 화장지를 두 칸 정도만 쓴다. 

그러고는 오마카세 한 끼에 50만원을 쓴다.

유일하게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마 청담 압구정 근처에 있는 오마카세를 많이 간 사람 중

손에 꼽히는 인물일 것이다. 

대충 세보니 가본 곳만 200군데가 넘으니 말이다.

신상 맛집이 생기면 불이나케 달려가 호구짓을 절로 한다. 


1월말에 스코틀랜드 출장이 있어서 비즈니스석을

아무렇지 않게 예약하는 내 모습에 놀랐다.

나이가 드니 장거리 여행도 이제 이코노미석으로는

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가는 여정이 너무 피곤하다면 그 곳이 최고라도

결국 집 생각, 집 침대가 간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집 만큼 완전하게 최적화 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출국 전이고 하니 인터넷 면세점을 둘러보았다.

굳이 사고 싶은게 있는게 있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게 있는지 보고 싶어서다.

롯데, 신라, 신세계 면세점을 다 들어가서 3시간을

뒤져보았지만 신발 한 개 정도가 전부였다. 

아는 지인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누구보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인지한다.


메뉴를 고를 때 가격을 보지도 않고 

출근하기 싫을 때 출근 안해도 되는

삶을 사니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하지만

난 어린 가난한 시절부터 부러움 많을 학창 시절과

돈이 많이 필요한 중년 시절까지

단 한 번도 가난하다고 느껴 본적이 없다.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나의 감정은 늘 같았다.

다만 통장의 숫자가 커지거나 작아질 뿐이었다.

나는 늘 그대로였고, 무언가 사고 싶은게

갈망하는게 없었고 부러운게 없었다. 


가끔 나는 돈을 써보려고 백화점에 가 본다.

요즘 트렌드도 볼겸 한 번 나를 위해 선물을 

해보자며 가본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본적이 없다. 가지고 싶은게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치기어린 소유에 대한 무관심은 허무에서

지금의 무관심은 풍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언제든 살 수 있다면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갈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끼면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평생 물건이 소유가 나의 목표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난 지금 좋은 차에 좋은 집에 풍족하게 산다.

계산하지 않는 삶. 더 갈망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남들이 부러워할만 삶.

그래서 더 행복하냐고? 어린시절이랑 큰 차이가 없다.

그건 그저 비교이고 감정일 뿐이다. 


욕망에 끝이 있을까.

내가 소유의 결핍을 채워가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 나는 풍족을 느낄수 있었을까. 

나는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느끼지 못했고, 나는 풍족했지만 더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수 억짜리 아파트에 들어가 대출금을 갚기 힘들다며 가난을 호소하는 사람.

아이들 학원비가 감당이 안된다며 힘들어 하는 사람. 해외여행을 가지 못해서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생계와 가난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과 가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사실 진자 가난해 본적이 없다.

늘 크게 욕망하고만 있다. 그래서 더 가난해진다.

가난하지 않아도 자기의 마음이 자기를 가난하게 만든다.

아파트에 살고 차를 끌어도 가난한 마음이 늘 붙어 다닌다. 


우리는 가난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도 가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가난한 인생을 만드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다. 


비오는 날 창가에 부딛치는 빗방물에도 가난은 뭍어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시그니엘 레지던스에도 가난이 가득하다.

결핍은 가난이 아니다. 욕망은 가난이 아니다. 


어린 시절 비 내리던 개울가 가재잡던 마음에도 부유함이 있고

할머니가 다락방에서 꺼내주던 무화과 말린 것에도 행복이있다. 

우린 더 많이 가졌지만 매일 더 가난해진다.

돌아갈수 없는 풍경들을 뒤로 한 채,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썩혀가면서

풍요의 한 가운데에서도 가난의 눈물을 흘리느라 바쁘다. 


평생 가난을 모르는 가난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젠 가난을 알고 싶어도

가난을 알 수가 없다.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연탄방 아랫목처럼

이젠 가난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구수했던 가난의 시절들이 영원히 사라져

이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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