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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May 18. 2023

디스토피아 세계에서의 생존 전략

풍요 속의 빈곤한 삶에 대한 단상

My Dog. I Like DYSTOPIA.



요즘 악플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안티프레질한 영역에서 볼 때 악플이 많아진다는 것은

'불편해도' 한 번 읽어는 본다는 의미다.

내가 원했던 바이다.


나는 나만의 생각을 나열하고 기록할 뿐인데,

누군가는 불편하고 싫다며 응석을 부린다.

조금 더 정갈하고 맞춤법에 신경쓰라는 조언도 듣는다.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고칠 마음은 없다. 나는 이게 편하다.


이쁜 장원영과 멋진 BTS에게도 누군가는 악플을 단다. 그들은 악플이 아니라 자기의 결핍을 고백할 뿐이다.

정작 잘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이렇게 자존감은 커져가고 의미 없는 타인이 트래픽을 형성한다.


늙어가는 우울한 독거 노인에게 최고의 고통은

사회적 무관심이다. 악담을 하고 돈을 뜯어가도

가끔 찾아오는 후레자식이라도 가끔 보고싶은게 인간이다.

앞으로도 악플러들이 더욱 많아질수록

더욱 불편한 글들로 꼬집고 일부러 맞춤법을 더 틀리면서 글을 써 내려갈 것이다.

정리하자면,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은 몸과 정신에 해롭다  



세상은 원래 이렇다.

긍정의 힘보다 부정의 힘이 강하고, 악플러들이 더욱 재미있는 악플을 단다.

누군가는 반응하고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무시한다.

나이들수록 세상의 본질은 더욱 간교하게만 보인다.

공정보다 불공정이 승리하고, 취약한 자들은 더욱 스마트한 자들에게 대놓고 수탈을 당한다.

바야흐로 현명한 분별력이 없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갈아마시는 악랄한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지금을 소위 디스토피아(Dystopia)의 시대로 칭하고 싶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의 과학기술과 삶의 질은

과거에 비하면 유토피아라고 할만하다.

검정고무신 바나나 한 조각을 온 가족이 나눠 먹었던 시대.

혹은 변기가 없어서 거리에 똥오줌이 강을 이루던 중세시대.

결국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해 시체와 쥐가 한대 엉켜 있어

썩은 내가 진동하고, 그 원인을 죄없는 여인들의 마녀사냥으로

돌리던 시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풍족함은 이루말 할 수 없이 대단하다.

매년 굶주림으로 죽는 것만큼 각종 비만과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지금은 가히 풍요의 시대라 할만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풍요롭다고 느끼지 못한다.


풍요에 걸맞는 더욱 비대해진 욕망이 감사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통신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풍요속의 빈곤의 크기를 더욱 크게 실감할 뿐이다.

도넛을 맛있게 먹었지만 그 가운데는 텅 비어 있고

건강만 악화되는 그런 삶이랄까.

굳이 환경파괴니 인류멸종이니와 같은 친환경 이데올로기를 들이데지 않더라도 우린 충분히 불행을 향해 가고 있다.

열린 세상이 만든 결핍과 탐욕의 딜레마다.


나는 디스토피아를 좋아한다. 나는 그 결핍과 부작위가 좋다.

완전하게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있다면 다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불완전해서 누군가는 결국 그 유토피아 안에서도 악을 행하고 우위를 점하려고 할텐데 그럼 결국 균형의 섭리는 깨진다.

역설적으로 인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 욕망으로 인해 더욱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꼴이 된다.

마치 AI(인공지능)가 발전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지만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의 괴로움은 더해가는 것이나 비슷하다.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나 기대할만한 깨끗한 공기와 맑은 하늘은 디스토피아 시대의 초입을 알려준다.

우리는 쓰레기를 돈을 내고 버리고, 물을 돈을 내고 먹는다.

그리고 이제는 공기도 돈을 들이고 시간을 내어서

마셔야할 판이다. 당연한 것들에 비용을 부담할수록 우리는 자연의 본질성과는 멀어지게 된다.


디스토피아의 시대가 강화될수록 우리는 당연한 것들에 더 많은 비용을 내야하고, 반대로 남들이 누리는 편리함을 같이 누리기 위해 추가 비용까지 내야 한다.

대체로 돈모으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세상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분별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이 중심에 있는 가장 관심있는 주제인 돈에 대해서도 디스토피아적으로 바라보면 재미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은 부자다. 경제적 자유다.

가장 부러워하는 것도 부자다.

이 가속화되는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돈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돈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이성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는 양상이다.

자. 그래서 그렇게 원했던 수십억 수백억을

개고생을 하고 투자를 하고 사업을 해서

얻었다고 치자. 대부분 그럴일은 없겠지만.


그럼 그 시점부터 딱 행복해지는가. 아님 허무해지는가.

뻔한 소리 같지만 우리는 부자가 되는 과정이 짜릿할 뿐 부자가 되고 나면 그냥 그렇게 산다.

부자가 되기 전에는 명품을 사고 싶지만,

부자가 되면 명품에 안 매달린다.

그때부턴 아비투스(Habitus)라는 명제에 시달린다.


하지만 빈자는 부자가 되어보질 않아봐서 그저 욕망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꿈은 돈 많은 백수다.

만약 그 논리가 정확하다면 트럼프와 백종원과 워렌버핏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살까. 심심해서?

유재석과 아이유 같은 연예인들은 돈이 남아도는데 익명의 악플 세례를 받아가면서도 굳이 왜 자기 일을 할까.

하여 돈 많은 백수가 꿈인 사람은 부의 껍데기만 아는 사람이다.

그 부에 다가서면 허무와 권태의 크기가 풍족함을 억누른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만 알지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 모른다.

그냥 유아인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빈자의 생각은 늘 비루해서 그냥 자기가 보이는 것만 믿고 돈만 많으면 다 해결될거라는 기대감으로 살아간다.

영원히 다다를수 없는 알수 없는 무한의 꼭대기로

내달리다가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체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앞으로 내 꿈은 돈 많은 백수가 아니라,

돈이 많아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라.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가끔 평일 출근을 하지 않고, 공원 산책을 가거나 여행을 간다. 그 여유야 말로 돈이 많아서 편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가커피 한 잔에 꽃내음 나는 공원에 앉아 햇살이라도 맞으면,

사람들이 왜 저장강박증에 걸려 허우적데는지도 대충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결국엔 다시 무언가를 하고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며 살고 싶은게 인간의 본성이다.

돈만 많고 놀고 먹는 백수는 사실 유니콘 같은 인물이다. 논리적으로 그런 부자는 존재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된다.


이런 부분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또 생존 전략이 나온다.

아니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거부가 되도 허무해서 무언가 목표의식이 필요하다는데,

나는 부자가 된적이 없어서 그걸 모르고 평생 모를 수도 있으니,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다.

지금 돈을 모으기 위해 괴로운데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징징데겠지만, 어자피 돈이 많아져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허무가 있다면 있으나 없으나 즐겁게 자기일하며 사는게 유익한 것이다.


그러다가 운 좋게 부자가 되어도 나름의

여유를 부리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하며 살면 된다.

그러니 지금의 빈곤과 무질서가 다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무작정 돈의 궤적만 따라서 살아간다면, 인생 전체가 도박이 될 확률이 크다.

돈에 대한 집착은 과거의 회한을 현재로 가져오고

미래의 불안을 현재로 끌어다 놓는 악랄한 면이 있으므로 그 속성을 파악한다면 꾸준한 삶과 현재 만족하며 조금씩 발전하는 삶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부는 무작정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운과 실력의 교묘한 조화가 장기간 작용하며 한 번에 생기는 것이다.


디스토피아 마니아로서 나는 요즘의 라이프가 게임같기도 하다.

물론 게임과 현실의 차이는 딱 하나다.

게임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만, 현실은 단 한 번이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과격한 미친짓을 해도 죽고 다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미친짓 한 번으로 소중한 시간을 날리게 된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너무 과격한 도전으로 삶을 망가뜨리는 선택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 한 번의 도전으로 모든 것이 망가지는 배팅은 일단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게임을 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총도 쏘고 주먹질도 하고,

익명대화방에서는 벼리별 어그로를 끌지만,

현실에서 돼지문신충이나 담배피는 고등학생들을 만나면 그냥 멀리 돌아서 간다.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면 고개를 떨구고 비굴하게 죄송하다고 하며 먼저 사과를 구하고 지나간다. 현실에서는 이게 생존 비법이다.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하겠다며 자존심 부려서 주먹 한 번만 휘둘러도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20대 시라소니처럼 게임과 현실을 구별 못하면 삶은 엇나가기 시작한다.

강자와 눈이 마주치면 혹은 미친 약자와 시비가 붙으면, 비굴하게 눈을 깔고 일단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젤라또로 기분을 풀어라.


마지막으로, 이 미쳐가는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지금 자신이 삶에서 상당히 비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마음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세상 탓 환경 탓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지옥은 스스로 만든 감옥이다.


그리고 어떤 잘난 사람도 어떤 부자도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지옥이 있다는 걸 알면 된다.

그 지옥으로 떨어져 평생 갇혀 살지,

빠져 나와 아니꼽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살아볼지

결정하는 것도 결국 자기 선택이다.


어떤 책이나 멘토 혹은 정신과 의사가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삶의 지옥을 만든 그 마음의 철장을 허물어야 비로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옥이 만든 결핍이 자신을 더 망가뜨리지 않게 평범함에 대한 감사함과 아름다움을 부단히 깨닫고 살아야 한다.

사람은 결국 평범한 공기를 잃고 나서야 당연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힘들지만 무언인가 꾸준하게 해 나간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장치이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든 가지지 않든 어떤 결정을 하든 신은 무심하고 세상은 무관하다.

나의 걍팍한 마음이 내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게

늘 자신을 단속하고 살아야 한다.


삶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고, 거대한 목표를 쫒지 않으며, 거대한 욕망, 화려한 미래 따위가 내 삶을 증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된다.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더 불행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늘 최적화를 추구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비합리적이여도 최선의 고통을 추구하는 것도 생존에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남은 유일한 명제는 우리의 존재는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괴롭게 살고 즐겁게 사는 것은 자기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너무 힘들고 자신을 파괴하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씩 제거하며 평범하고 감사한 것들만 남기고 다 버려보라.

그래도 인생은 한 번 정도는 살만하니까.

눈 딱 감고 그냥 살아봐라. 어자피 원치 않아도 때 되면 죽는다.  



그대 그리고 또
나를 위해 소리없이 기도해요
많은 바램 많은 욕심
그것 때문에 세상에 지치지 않게

-이승환 노래 '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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