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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Jun 27. 2023

실존; 세이노를 Say No 하라.

결핍과 부에 대한 실존적 해석

최근에 서점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세이노의 가르침'을 보았다.


원래 이 글은 세이노라는 필명을 가진

익명의 자수성가 부자가 쓴 글들을

여기저기 짜깁기 해서 나름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통로를 통해 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재편집돼 서점에 비치된 것을 보고

그 인기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이 저자의 책을 이미 5년 전에 다 읽었고,

줄치면서 한 줄 한 줄 세심하게 읽어가며

인사이트를 느껴 본적이 있다.


자수성가형 부자답게 거침 없는 필체와

사회 비판과 다양한 처세술은

필터링이 안된 원형의 모습으로 충분히

문외한 일반인들을 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세이노에 열광하며

부자되고 삶의 지침서라며 추앙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겠는가. 나에게는 전혀 어필이 안됐다.

좋은 글이고 좋은 지적도 많은 것은 맞다.

삐딱한 성격때문에 그리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 삶을 바꿀 문장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삶의 방식은 이렇게도 차이가 나는 법이다.


혹자는 이야기 한다.

그래도 자수성가한 부자말을 들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과연 그럴까. 그것조차 나의 착각이 아닐까.

나 역시 시골에서 태어나 먹고 살만치 성공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주변에서 치켜올려주지만

나는 늘 내가 운으로 성공한 측면이 크다고 말한다.

운과 실력의 교묘한 조화가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말이다.


내가 남들이 말하는 부러운 부자가 됐다고 해서,

내가 내 실력으로만 됐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진자 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부자들의 헛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가 노력을 해서 만든 결과물이 분명하고

주변에서도 엄지척을 하니 자기만의 아비투스를

만들고 주변에 설파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만하면 굽신굽신하니 그 돈이 만들어낸

존경의 환상을 실컷 느끼며 심취한다.

그래서 단언을 시작하고, 숨겨왔던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자기가 성공이란 걸 맞봤으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대중은 신비주의에서 나온 자수성가 부자의

모든 행동에 열광한다.  


"맞어! 맞어! 이 말이 맞는거 같애! 내가 그렇게 안 살아서 아직도 가난해! ㅅㅂㄹ"


나는 비정형적인 무질서의 삶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찌보면 회의론자 무신론자 허무주의자에 가깝다.

그런 영역에서 인간의 욕망에 투영된 스펙트럼만으로 세상을 평가한다. 내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내맘이다.


하지만 그 평가를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조차 나의 생각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공유하는 것에 불과할 뿐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면 이데올리기의 판때기에서 좌우가 싸우고, 남과 여가 머리끄댕이를 잡고 흔들며, 인종과 소수성이 서로 자기가 맞다면 칼을 들이데고, 편을 만들어 돈을 번다.

누가 과연 맞는가.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가.


정리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것. 자기가 잘 아는 것. 자기가 유리한 것.

을 선으로 여긴다. 악은 이와 정반대편에 있는 모든 것이다. 하여 이 세상에 절대적인 악과 선을 이데올로기에 접목시켜 평가하는 사람은 하수다.


발칙한 예로 들어가 볼까.

어벤져스 타노스를 보자. 과연 어벤져스가 악인가. 타노스가 악인가.

우린 늘 어벤져스의 편이다. 왜 우주 인구의 절반을 없애려는 타노스는 미친 살인자에 불과하니까.


과연 그럴까.

공상과학이니 이해하고, 무한정 늘어나는 우주 인구를 줄여야 우주가 정화된다고 믿으며, 사랑하는 외동딸도 죽여가며 혈혈단신 보석을 모아가는 타노스가 악한가.

때로 몰려다니며 자기 옆에 사랑하는 사람 몇명 사라지는게 싫어서 인구가 폭증하든 말든 우주가 오염되든 말든 그냥 내 사람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벤져스가 선인가.


우리는 인간이라서 우주의 섭리를 매크로하게 볼 수 없다.

2차원 땅바닥에서 개미가 3차원 세상의 인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 공포조자 느끼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사이즈다.


그래서 어벤져스는 타노스의 매크로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노스가 대의를 이야기 한들 어벤져스는 들은 채도 안하고 사랑하는 사람 죽으면 안된다는 신념하나로 타노스를 다구리 시킨다.


일제시제로 돌아가 보자.

혹시 모를 매국노 소리 들을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겠다.

우리는 현재 친일파를 색출하고 그 자손들을 욕하고 천하의 매국노라며 평생 저주를 퍼붓는다.

물론 나역시 일본 맥주와 애니는 좋아해도

친일파는 쓰레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일제 시대에 장사꾼이었다면

혹은 애 둘가진 가장이었다면 어떨까.

친일파인지 아닌지 데이터로도 없는 걸 일일이 구별하며 장사를 할수 있을까. 우리 독립 전쟁에 악영향을 끼치니 나는 친일파스러운 사람한테는 장사도 거래도 안해야지 하면서 그런 면밀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까.

거기다 더해 우리 아이들이 굶고 있는데, 친일파랑 연관된 사람인과 절대 거래 안하고 우리 민족끼리만 거래하는 신념으로만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말로는 늘 애국하고 매국노를 처단한다.

하지만 이젠 일본 여행에 미치고 일본 맥주에 미친다. 얼마나 오래됐는가. 이번엔 진자 노재팬 한다면서. 사람은 이렇게 간사하다.


그런면에서 우리 독립투사들은 대단하다.

자기 목숨을 바쳐가면서 기약도 없는 독립을

위해 가족 버리고 목숨 버린 그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친일은 안해도 그런 독립투사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우리 생계형 서민들은 친일이 뭔지 그냥 매일 밥 빌어먹을 생각하기도 바빴을 것이다.

자기가 독립투사를 했으면 자손들이 대대손손

국가로부터 존경을 받았을텐데, 그런 사람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그냥 현실을 살았을 뿐이다.


우리의 심리는 이렇게 환경이란 어항에 빠지면 빈곤하여 분별력이 없다.

결국 모든건 자기 유리한 상황을 위해 판단됨에도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고, 누군가의 열광에 동조한다.


말로는 부모님이 두 눈이 실명하면,

내가 눈 한쪽 드릴거라고 멀쩡할 때나

술김에는 그렇게 말하지만,

진자 아버지가 눈 두 쪽이 실명되면

실제로 눈 하나 빼주고 자기가 애꾸눈이

되려는 자식은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두 눈이

장님이 되면 고민 없이 눈 두 쪽을 주신다.

그게 바로 진실과 주둥이의 차이점이다.


왜냐면 말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에 대한 관점도 비슷하다.

서점과 유튜브에 부자들의 언어가 떠돈다.

누구는 부동산, 누구는 주식, 누구는 비트코인.

그들은 그저 자기가 성공한 일부분의  연속된 운을

사업으로 잘 포장해 콘텐츠를 만든다.


아마 부자 되보겠다고 이거저거 투자하다가

거지 된 사람이 수십 수백 트럭은 많을텐데

그런 사람들은 존재자체를 모른다.

우리는 늘 성공론에만 열광하지 패배론에는 무심하다.


그래서 누구의 말처럼,

성공한 사람은 대중 앞에서 자기가 잘났다고 큰소리 치지만, 패자는 통계에서 조차 사라져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관심 갖는것초자 나의 패배에 영향끼쳐 재수 없을까봐 근처도 안간다. 그리고 한때 성공했다가 패배한 패배자는 그렇게 죽어간다.

그리고 자연인에 나와서 장작 피우며 허세를 떤다.

하지만 아무도 안 믿는다.


우리는 돈에 대해, 부자에 대해 필터링이 어렵다.

갈수록 천민자본주의 극강의 첨탑으로 올라가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돈은 최고의 로망과 권력이

됐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중금속은 마치 어벤져스처럼

삶과 우주의 대의라는 명제를 잊고, 지금 집중된

나의 결핍을 부각시키고 달려가는데만 급급하게 만든다.


이런 말은 하는 사람은 진정 한 명도 없는가.

내가 그럼 그런 소리를 최초로 해보겠다.


9급 공무원도 훌륭하다. 나름의 노력으로 만족하고 살면 된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가. 취업이 힘든 시기에 그정도 노력도 훌륭하다.

그리고 취업이 안된다 한들 평생 편돌이 좀 하면서 만족하고 살아도 된다.

가정주부인가. 남편한테 돈 받아 쓰는게 좀 부족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표현하며 애들 잘 키우는 것도 매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배달일을 하는가. 누군가는 그 음식으로 하루를 편히 때우고, 택배 하나 받기

위한 설레임으로 하루를 산다. 그러니 지금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아둥바둥 산다고 생각하지 마라.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날들이 올 것이며, 안 온다고 해도 그냥 즐거운 맘으로 살아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불행은 남과의 비교에서 온다.

조던 피터슨의 말만을 기억하자.


남과 비교하지 마라.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는지만 비교하라.  


강남 3구 고급 아파트에 빚을 내며 살며, 부자들의 아비투스를 따라 하겠다며

대치동으로 애들을 학원 보내고 비싼 명품 무리해서 사서 치장하고 그렇게 살면서 집에 들가면 돈이 부족하다며 징징되며 부부싸움하는 삶.


혹은

인천 변두리 빌라에서 전세로 살면서 애 둘 낳고 아내는 살림하고, 남편은 하루종일 택배기사 하다가 들어오면 와이프가 그래도 내 남편 고생했다고 찌개라도 끓여서 넷이 밥상에서 오순도순 먹는 것.


무엇이 빈곤이고 무엇이 부자인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물론 돈이 절대적으로 없으면 사람은 비참한게 맞다.

하지만 이마져도 상대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썪은 물 길러오겠다고 3시간 왕복

걸어갔다 오는 아이들이 보기에는 당신의 비참함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느끼는

결핍도 나의 비교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


자 아직도 비참한가.

아파트가 없어서, 빌라가 전세여서,

여친이 없어서, 대기업을 못가서

사업을 못해서, 부자가 못되서, 주식이 손실나서,

세이노를 닮지 못해서 성공하지 못해서.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 인간의

표상인 결핍을 다 없앨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 하버드를 나오고 때부자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대기업 회장이 되도

더 커진 하강효과가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나의 결핍이 열심히 사는 동력 정도가 되면

된다. 거대한 야망, 거대한 희망, 거대한 절망은

삶에 유해하다. 우린 다다를수 없고, 다다른다 해도

권태에 빠져든다.


부자들이 대중 앞에서 주둥이를 털고 싶은건

모순적이게도 그 거대해진 권태 때문인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수사적인 어법과 권위적인 말투가 습관처럼 배여든다. 나 역시 그런 부류 중에 하나다.


그러니 그냥 지금 설레임으로 작은 희망이라도

욕구하며 살때가 가장 행복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초라한 건지 세상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내 삶의 남은 죽음까지의 타이머를 보라.


최근 통계청 조사를 보니 한국 남성 35%는

69세 전에 자연사 한다. 69에서 내 나이를 빼보니

정말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는데, 우린 그런건

보고 싶지도 않고 보이는 것만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존재의 감사를 놓치며

미래만 생각하며 끝 없이 늘어나는 욕망만 쫒게 된다.

하여 우리는 지금 불행하고 앞으로도 불행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세이노의 책을 독파하고, 세이노처럼 살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성공을 하고 나면 진정 행복할까.

그리고 나는 진자 부자가 되면 자신의 아비투스를 설파하는 주둥이를 털지 않고 만족하며 조용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세이노의 책을 읽어라.

그리고 세이노처럼 살지 않아도

나름데로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아라.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결핍은 그 자체로 살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니까.

나를 결핍의 노예로 몰아 소중한 하루를

쓰레기통에 쳐 넣지 말아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며, 남이 아니다.

내가 당당하다면 어떤 모습의 나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결핍 마저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세이노의 말을 Say No 해보라.

삶의 욕심과 불안을 조절하는 것도 자기의 몫이다.

평범한 삶. 만족하는 삶도 온전히 자기 것이다.

  

진정한 부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잠을 충분히 자고,
깨끚한 양심과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수시로 웃고, 혼자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고,
헬스장에는 최대한 가지 않으며, 육체 노동이나 취미를 적당히 하고,
장 운동이 제대로 되고, 회의실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주기적으로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데에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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