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마음 아픈 것 / 깔루아 밀크
아직은 한산한 시간인 8시 반, 한 여성이 바 안에 쭈뼛쭈뼛 들어왔다.
왜소한 체격에 크로스백을 두 손으로 꼭 쥔 그녀는 내가 안내한 바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위스키 쪽 메뉴판을 보던 그녀는 이내 나를 향해 예의를 갖춘 미소로 맥주를 주문했다.
-이 근처 사세요? 처음 뵙는 것 같아서요.
내 질문에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굴 좀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그녀가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아 더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한 시간 후 그녀는 두 번째 맥주잔을 다 마시고는 손을 들어 날 찾았다.
-저... 위스키를 좀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다리시는 분은 오려면 멀었나 봐요?
첫 샷잔을 단번에 들이켠 후 그녀는 표정을 찡그렸다.
-아, 그게 사실...
그녀가 내가 내민 물 잔을 받아 마시며 말했다.
-제가 마냥 기다리는 거라,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마른세수를 했고, 내가 작은 초콜릿을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자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제 남편인데, 사실 제가 결혼한 지 이제 겨우 1 달이에요. 연애는 좀 오래 해서 5년 정도 했고요.
그녀는 초콜릿의 포장을 천천히 벗기며 말했다.
-근데 최근에 싸웠는데, 남편이 집을 나갔어요. 그리고 남편 본가가 이 근처인걸 알아서 제가 왔고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두 번째 샷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럼 너무 취하시면 안 되지 않아요?
내 말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못 만날 것 같아요.
그녀는 표정이 바로 어두워져 빈 잔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었어요. 뭘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다 해내더라고요. 대학생을 끝내더니 대뜸 게임 하나에 푹 빠져서 걱정했는데, 그 길로 바로 프로게이머가 되더니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1년 정도 하더니 때려치웠죠. 재미가 없대요. 그리고는 그간 번 돈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오겠다며 갑자기 일주일 전에 예약하고 훌쩍 날아갔어요.
그녀는 세 번째 샷잔을 반 정도 비운 후 말을 이었다.
-한 달인가? 후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갑자기 여행작가를 해보겠다며 여행 다녀온 글을 썼는데, 그게 또 어디 눈에 띄었는지 작가로 계약을 하더라고요. 선인세로 몇 억을 받으면서요.
왜소한 여성은 자랑하듯 신이 나서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참 멋있긴 해요. 뭐 하겠다 하면 해내는 모습이... 저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매일 살아남는 게 벅차서... 그 사람을 늘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늘 응원하지만...
-쉽지 않은 감정이겠네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진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둘이 있을 땐 또 저한테 정말 잘해줬어요. 바람 같은 문제도 없었고, 본 게 많고 아는 게 많아서 그런지 같이 있음 참 즐거웠고요.
나는 그녀가 메뉴판을 다시 보려는 걸 부드럽게 말리며 말했다.
-너무 센 술만 드시는 것 같아서, 조금 쉬어가는 의미로 부드러운 칵테일 어떠세요?
-칵테일이요?
-네. 달달하니까 기분도 나아질 거예요.
그녀는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에게 깔루아 밀크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잔에 얼음을 적당량 채운다.
깔루아는 1oz 넣는다.(상당히 단 리큐르이므로 단 맛을 싫어하면 줄여야 한다)
우유 150ml을 펌핑기로 거품을 낸 후 잔에 넣는다.
밑에 깔린 깔루아 때문에 스틱 혹은 빨대를 주며 저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이 칵테일 드셔보셨죠?
여자는 빨대로 한 입을 들이킨 후 더욱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뇨! 처음 먹어봐요! 정말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난 그녀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참 잘 웃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녀는 깔루아 밀크만 세 잔을 더 마셨고, 시간은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계속해서 확인했고,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서 어느새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녀에게 물을 몇 잔 계속 권해주었다.
그렇게 어느새 12시 30분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계산이요.
나는 계산대에서 그녀에게 깔루아 밀크가 마음에 드셨는지 물어보았다.
-참 달고, 맛있었어요. 감사해요.
그녀는 카드를 내밀며 이어 말했다.
-근데 앞으로는 달콤한 건 뭐든 좀 피할래요... 사람도 술도... 그 밑에 깔린 게 너무 무서워서...
-깔루아 밀크가 은근히 취하는 술이긴 하죠.
-네... 아무래도, 저는 달콤한 거랑 안 맞나 봐요.
그녀는 영수증을 챙기며 마지막으로 힘내듯 내게 웃어 보였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그 후, 그녀는 다신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