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양심적 허용이 될까
유난히 여유롭여서 손님이 없는 밤, J는 혼자 위스키 잔을 비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낸 사업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들어보면 그럴만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말하기를,
-쉽고 빠른 길이 깨끗하기까지 바라면 안 돼. 얼른 먼저 도달한 후에서야 씻든가 말든가 하는 거지.
그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높은 위치가 되어서 원하는 일만 골라서 하지만, 어렸을 때는 불편한 접대도 열심히 쫓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오늘은 조금 널널하네.
그가 지루해하던 중, 입구로 한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여기 앉아도 되죠?
그는 내가 안내하지 않아도 바 테이블에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난 그가 주문한 맥주를 그에게 건네주며 인사했다.
-처음 뵙는 것 같네요.
그는 내 인사에 가볍게 미소를 띠며 답했다.
-네. 이 전에 몇 번 왔었는데, 그때마다 조용히 먹다 가서 인사는 처음 나누네요.
그는 자신을 어느 연구소의 소장이라고 소개하였고, 그쪽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들어도 언젠가 뉴스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범인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대화 나누는 것을 즐거워하는 J는 바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통 중년 남성들의 대화는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확인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의 교착점을 몇 다리를 건너서라도 찾아내곤 하는데, 인맥이 넓은 J는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그쪽이시군요? 제가 그쪽에 아는 분들이 좀 있습니다.
-아, 네... 뭐 저는 이 자리 앉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릅니다.
소장은 미소를 잃지 않고 그에게 답해주며, 자신이 얼마나 올곧게 살아 이 위치까지 왔는지 풀기 시작했다.
-다들 저를 누르려고만 했어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미움 많이 받더라고요. 골방 신세 참 오래 겪었죠.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J가 말했다.
-그럴 땐 조금 가려운 데를 살살 긁어주면 일이 참 쉽게 풀릴 수도 있는데...
-그럴 성정이 못 되어서요, 저는. 허허허.
두 사람의 대화는 잔잔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만 불편하면 길게 편할 수 있는 길을 걸어온 J와, 곧 죽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믿고 살아온 소장.
가령, 소장이 용기가 가득해서 말을 꺼낸다.
-저는요, 이번에 이 자리 잡고 나서 지금 마음먹은 게... 간부급을 다 쳐내려고요.
-그게 참 쉽지 않으실 텐데요. 그들이 쥐고 있는 게 무시 못하는 것들일 텐데...
그럼 소장의 말에 J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식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사이
[변신], 이나 [어느 개의 연구], 그리고 [재판(혹은 선고)]으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라는 작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Es gibt ein Ziel, aber keinen Weg.
목표가 있을 뿐이지, 가는 길이라는 것은 없다.
Was wir Weg nennen, ist Zögern.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에 불과하다.
흔히들 말하는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일 것이다.
사업적인 마음으로 사는 사람일지라도, 학자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일지라도 망설이지 않았으니 어떤 정점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긴 대화가 오간 뒤, 자리를 먼저 일어난 소장의 뒤로 J는 내게 말했다.
-저렇게 독불장군이면 안돼... 모든 균형이란 게 이유가 있는 건데, 나만 잘났다고 다 뒤집어 버리겠다고 하면...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저런 분들이 또 세상을 바꾸기도 해요. 이미 그렇게 해서 저 위치까지 오신 거잖아요.
J는 가게 문을 나서며 담배를 물고 말했다.
-응원은 하지... 누구는 안 그러고 싶었겠냐고.